역사가 무협지가 아닌 이유

in #kr6 years ago

역사가 무협지가 아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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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와 사파가 다투는 무협지적 가치관을 역사에 대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걸 ‘관점’이라는 근사한 말로 표현하는 경향도 적지 않다. 한 사람의 인생도 복잡하고 중층적이며 맥락과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데 한 시대의 역사를 단칼로 두부 자르듯 베어 내고 저쪽은 악하고 죄인이며 반동이라고 부르짖는 것만큼 무식한 일도 없을 것이다. “빨갱이냐 반빨갱이냐”로 수십년 밥 벌어먹고 사람 잡아온 수구 진영에만 해당되는 일도 아니다. 자칭 진보들 사이에서도 이런 경향은 얼마든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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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하나는 소설 <태백산맥>에도 드러났던 시각인 바, 6.25를 두고 ‘외세와 반외세의 전쟁’이라든가 ‘반민족주의자들과 민족적 입장을 지닌 이들의 전쟁“이라고 못 박는 경우다. 분단은 그렇다 치고 어차피 북한군이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이 쓰던 T34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가로지를 때부터 외세는 개입돼 있었다. 북한이 ’자주적‘으로 전면 남침을 할 능력은 못되었기 때문이다. 남이나 북이나 결국 외세의 대리전 치른 마당에 외세와 반외세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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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이런 시각도 있다. 한국군은 친일파들의 군대였고 인민군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끈 군대였다는. 그런데 한국군에도 독립운동가 출신들은 꽤 많이 있었다. 더하여 한국전쟁은 결국 이념에 따른 결단들이 떼를 지어 격돌한 전쟁이었다. 남한이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고 실질적으로 그들이 사회적 주류를 형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해도, 한국전쟁을 친일파 VS 독립운동가의 구도로 보는 건 대단한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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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창설의 주역이자 여순사건 때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송호성은 독립운동가 출신이었고,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장군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독립운동가 집안 사람이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범석이 다름아닌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그 아래서 북로군정서 1중대장을 했던 강근호는 전쟁 때 쉰을 넘긴 나이에 참전하여 펀치볼 고지 등에서 인민군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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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인 이정희 여사는 저 유명한 경주 이씨 6형제 중의 하나이자 대한민국 부통령을 역임한 이시영의 증손녀다.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서 정훈 병과에서 일하다가 30년 나이 차를 무릅쓰고 강근호 장군과 결혼했다. 또 서울 함락 후 한강 방어선을 사수해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던 김홍일 장군은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에 쓰인 폭탄을 전달한 사람이고, 수십년 동안 독립투쟁의 일선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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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참 말 쉽게 “6.25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싸움”이라고 떠벌이는 사람 보면 어이도 없거니와, 얼마 전에는 “친일파들이 일본군에게 배워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말을 들었다. 헌데 그 말을 들으며 바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1951년 초, 11사단장을 하던 최덕신이었다. 걸출한 독립운동가 최동오의 아들이다.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씨가 유리걸식하다가 최덕신을 찾았을 때 그를 살뜰히 돌봐줬던 일화로 미루어 인품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가의 자제이자 그 자신 독립군이었던 최덕신은 한국 전쟁 역사상 최악의 민간인 살해의 주역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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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비토벌 임무를 밭은 11사단장으로서 이런 작전을 썼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때 공비토벌의 기본 작전개념으로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을 썼습니다. 손자병법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국부군의 지장 백 장군이 항일전에 적용해 많은 성과를 거둔 작전개념이기도 해요. 내용은 꼭 지켜야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확보하고 부득이 적에게 내놓는 지역은 인력과 물자를 이동하고 건물을 파괴하는 등 깨끗이 청소해버려 적으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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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벽청야. 이건 주로 우세한 침략군을 맞아 방어군이 쓰는 작전이다.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적에게 보급이 될 요소들을 끌어들이거나 소각해 버리는 전술. 그런데 공격하는 측이 이 전술을 쓰게 되면 일종의 ‘초토화’ 전술로 변한다. 상대방을 성 안에 가둬 버리고 보급로를 차단하고 굶겨 죽이는 것. 아울러 성 바깥의 동조 세력이나 보급 역량을 없애 버리는 것. 그에 따라 11사단의 연대들에게 내려온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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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하 대대에 작전 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 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할 경우 소각하라.”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산다. 즉 명령을 내리는 자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11사단 화랑부대는 전남 함평과 경남 거창에서 가공할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다. 심지어 사람들 모아 기관총으로 싸그리 훑은 후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이 살려 주신 것이니 살려 주겠다. 일어나라.” 해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추가로 쏴 죽이는 연기력도 과시했고, 공비가 도저히 되질 수 없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들까지 말끔히 죽이는 괴력을 발휘했다. 한국군의 흑역사다. 그런데 이 흑역사의 책임자는 독립운동가 출신의 한국군 장성이었다. “친일파의 겁박을 못이겨” 그런 게 아니라 그 스스로 위에서처럼 자신의 ‘작전’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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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외무장관까지 올랐다. 서독 대사 시절 동백림 사건이 벌어지고 그 때문에 환멸을 느낀데다 김일성의 극진한 대우를 받은 아버지의 예를 알게 되면서 그는 친북으로 기울고 마침내 월북하고 말았다. 김일성 주석의 대우도 극진하여 최덕신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궁금하다. 과연 그 영화에는 거창 양민 학살이 어떻게 묘사돼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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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최덕신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그 아들이 또 대를 이어 월북했다는 뉴스가 떴기 때문이다. 최덕신의 부인 류미영 (이 분도 독립운동가의 따님이다)이 북측 이산가족의 대표로 왔을 때 차남을 만났다는 뉴스를 들은 바 있는데 아마 그 차남이 월북을 선택한 것일 게다. 아버지의 월북 후 그가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를 익히 짐작하기에 그 선택을 나무랄 마음은 없다. 김일성도 떠받든 최동오, 사망 후 김일성이 직접 문상왔던 최덕신의 아들이라면 아마 오늘날의 김정은 위원장도 아주 모른다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그 처지였어도 월북을 고민했을 것 같다.

다만 이 월북 뉴스 가운데 “독립운동가이자 천도교 교령”으로만 소개되는 그 아버지 최덕신을 보면서 1951년 거창과 함평 생각이 난 것이다. 견벽청야는 일본군도 의병 투쟁 당시 즐겨 썼던 전술이다. 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빼앗아 없애던 삼광(三光)작전. 동족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한 사건 가운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범죄를 자행한 건 친일파도 아닌 독립군 출신의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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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독립군 별 거 아니냐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냐고 누가 말한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말하겠다. 단지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하고 가르고 맞서면 되는 흑백의 바둑판일 수 없고 정파와 사파가 갈린 무협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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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일방적인 종북 간첩 공산 좌파적 시각은 아닌 것 같군요.

가슴 아픈 현실이자 부끄러운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