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다(10)
그땐 그랬었다(10)_후임을 만나고
뎅기열로 인해 한국으로 후송된 이후, 상태가 바로 호전되진 않았지만 현지 활동에 대한 미련과 책무를 다하지 못한 자책감으로 서둘러 근육통 치료를 받으며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맨손으로 돌아온 탓에, 서울에서 치료를 위해 병원을 오갈 때는 큰언니 댁에 머물렀다. (노모께서 건강을 완전히 잃은 막내의 모습을 보시고 너무 놀라실까 본가 근처는 얼씬도 못하고) 현지에서는 여름에 떠났지만 서울은 겨울이었고, 치료 중 겨울의 끝자락으로 시간이 흘러 입을 옷과 신발 등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구입해야 했다. 돌아갈 준비를 하며 현장에 필요한 물건, 그간 살펴준 분들께 드릴 감사의 작은 선물 등을 챙기느라 치료 중간중간 외출을 했고, 어느 날 다리가 풀려 횡단보도에서 넘어지고, 버스 정류장에서 쓰러지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돌아갈 날을 손꼽으며 살찌우기에 매진했다.
이후 뎅기열로 인해 1993년~1994년 연말연시, 현지 병원–한국의 을지병원–마포에서 먼 고대안암병원까지 통원하며 근육 수축·이완 훈련 치료를 마치고 스리랑카로 돌아간 시점이 4월 중순경이었다. 날씨는 왜 그렇게 더워졌는지… 외출하고 돌아오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치기 일쑤였고, 남자 코디네이터의 수발을 청할 수 없는 사정이라 동기들이 주말에, 수도 인근이 근무지였던 후배들의 살핌이 필요했다. 더 이상 그렇게 신세 지는 것은 원치 않았고, 무엇보다 상태를 확인한 코디네이터의 보고에 따라 결국 중도 포기를 결정할 위기에 처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건강만은 내 의지와 형편으로 맞출 수 없다는 좌절감에 괴로웠지만 결국 중도 포기를 결정했다. 콜롬보에 도착 후 조금 회복한 뒤 임지로 돌아가겠다는 호언장담은 불과 며칠 만에 임지로 향하게 되었고, 이내 두루두루 작별 인사를 하며 하숙집에 남겨둔 짐 중 많은 것을 현지 친구들과 나누고 조촐하게 꾸려 콜롬보로 향했다. 그중 몇몇은 콜롬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 어느 날 병원을 찾았더니 한국에 돌아갔더라며 아쉬움을 전했고, 다시 간다며 울며불며 작별식을 하고 콜롬보 호스텔로 돌아왔다. 또 며칠이 지나 동기들과 4기 후배, 잔류했던 선배 몇 명과 송별회를 하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늘은 임기를 마치지 못한 선배의 빈자리에 파견된 5기 후배와 만나 당시 몰랐던 사정과 이후 160기, 166기 후배들과의 만남도 가졌다. 지난 추억과 봉사단 파견 제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내게는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빈 선배의 후임으로 갔지만, 선배는 이미 1년여 현지어로 소통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고, 한국으로 연수를 다녀온 나름의 공헌도 있었다. 선배는 WDF를 꿰뚫고 있었지만, 갓 파견된 신입은 현지어도 낯설고 업무도 익히기 전에 WDF는 한국 연수 이후 프로그램에 여러 날개가 달려 전국 각지의 연수단들이 버스를 대절해 함반토타로 와서 숙박하며 교육 훈련 프로그램으로 분주해졌다. 신입 후임을 따로 챙겨주는 사람도 없어 사무실 곳곳의 서류를 정리하며 일을 익히려 했지만, 기관에서는 선배가 했으니 당신도 한국으로 연수 갈 수 있게 해달라며 지나친 요구를 거듭했다. 결국 여기저기에 부딪히며 하루하루를 이어가다 파견된 지 4~5개월 만에 상황을 스스로 정리한 코디네이터에 의해 전혀 다른 임지로 재배치되었다는 후일담을 나는 32년 만에 제대로 듣게 되었다.
지난 세월과 당시 4기, 5기 후배들의 현재 소식까지 들으며, 5기 후배는 오늘 일정을 마치고 다시 4~5시간 거리의 캔디 집까지 가야 하는 일정에도 너무 아쉬워 잠시라도 차 한 잔 더 하자며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랑카 브랜드 BAREFOOT에 들러 수다를 이어갔다. 다양한 컬러와 직조 원단으로 시작해 지금은 레스토랑까지 확장된 거대 기업이다. 수다 속에서 몇몇 후배들의 소식에 감동과 안타까움, 동기들의 소식까지 들으며, 당시 호스텔에서의 생활, 봉사단 선발과 파견, 그리고 현지 활동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전체적으로 높아진 지원자들의 평균 연령(최근에는 정년퇴직 후 봉사단원으로 지원한 경우도 많음) 등 예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와중에도 함반토타 WDF의 현재 상황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도움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어떤 제도나 지원을 청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했다. 여러 대안을 제시했지만, 현실적으로 누군가 나서서 만들어갈 수는 있겠으나 그 문제 해결의 중심축에서 기꺼이 활동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 서로 더 고민해보자며 여운을 남기고 각자(캔디로, 근무 중 잠시 출타해 다시 복귀, 그리고 다른 미팅을 위해) 기약은 없지만 SNS 흔적을 남기기로 꼭 약속하고 헤어졌다.
후배들과의 만남 이후 지도를 보며 그 뙤약볕에 거리를 반대로 걸었던 4,000보, 정말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했던 순간. 왜 하필 그때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시던 그 친절한 영감님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건지… 차라리 지도를 한 번 더 살폈어야 했다. 걷다가 걷다가 아무래도 있어야 할 이정표가 안 보이고 이상해 지도를 검색하니, 아이고 세상에, 반대로 걷고 있었던 것. 거리 구경 삼매경에 땀을 쏟으며 걸었더란… ㅠㅠ
어쨌든 호텔로 돌아와 땀으로 범벅된 몸을 샤워로 씻어내고 예정된 오후 일정을 위해 다시 외출했다. 신혼부부의 안타까운 사정으로 가족 다섯을 한꺼번에 만나야 했던 상황, 위로 겸 햄버거 잔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있었다. 아직 결론에 이르진 않았지만, 한국과 20년 넘게 교류하며 작은 무역을 하던 현지 인연이 딸의 결혼과 동시에 신혼여행 겸해 있던 땅을 쪼개 팔아 자신이 겪은 한국을 보여주고 싶어 큰 결심을 하고 여행사를 통해 7박 8일 일정의 한국 여행을 계획했지만, 비자는 반려되고 여행비 전액을 돌려받지 못한 사정으로 큰 상심을 겪었다. 담당자들의 불친절로 인해 한국대사관은 물론 한국에 대한 원망이 짙어질까 걱정되어,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조언을 하고 마지막 날 출국 전 한 번 더 미팅을 하기로 했다. 오지라퍼…!! ㅠㅠ
오늘 날씨를 겪으며, 치료를 마쳤다고 여기고 임지로 돌아가 또 열심을 냈더라면 아마도 오늘 이런 일상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때 그 결정을 되새김질해보는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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