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3(수)기자조선을 한반도로 끌어들인사람, 소설가 이율곡

어떤 재능이 있다는 것은
특정 개인의 입장에선 축복이지만,
그것이 앞뒤를 모르는 재주에 불과한 경우
세상에 큰 죄를 지을수도 있다.

우리 역사상 인물들중에
아마도 율곡 이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덕분에 그 모친까지 유명하게 만들었으니
가문의 영광이겠으나,
기록으로서의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늘을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재주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되는 인물이다.

이율곡을 평가절하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짧은 지식으로
문서를 요약정리하는 뛰어난 재능을 사용해서
대륙에 있었던 기자의 조선현을
수천키로 떨어진 한반도 평양으로 끌어온 것이다.
친일 사학자였던 이병도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

무지 때문에
종교라는 마약때문에

이율곡의 주장을 보자.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도道를 전하고 나서 벼슬을 하려 하지 않자, 무왕武王 또한 감히 강요하지 못했다. 기자는 마침내 중국中國을 떠나 동쪽으로 조선朝鮮에 들어왔다.
중국인 중 그를 따른 자가 오천 5천 명이었는데, 시書, 서書, 예禮, 악樂, 의술醫術, 무당巫堂, 음양陰陽, 복서卜筮에 종사하는 자들과 온갖 기술을 가진 백공百工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무왕武王이 이 소식을 듣고 이로 인하여 그를 조선朝鮮에 봉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게 했다.
<기자실기, 한국문집총간, 율곡전서, 栗谷先生全書卷之十四 ,雜著 >

들판과 도읍에서 (백성들이) 식기를 변두籩豆(=그릇)로 삼아 음식을 먹었다. 신의와 겸양을 숭상하고 유교 사상을 돈독히 하여 중국中國의 풍속과 교화를 이루었다. 전쟁과 다툼을 숭상하지 않고 덕으로써 강포한 자들을 복종시켰다. 이웃 나라들이 모두 그 의로움을 흠모하여 귀부했다. 의관 제도도 모두 중국 중국과 같았다.
<기자실기, 한국문집총간, 율곡전서, 栗谷先生全書卷之十四 ,雜著 >

그 후 기자 箕子가 주 周나라에 조현朝見하러 가는 길에 옛 은毀의 폐허를 지나게 되었다. 궁실이 허물어지고 붉은 기장[朱黍]이 자라는 것을 보고 기자 箕子가 슬퍼하여 맥수지곡麥秀之歌을 지어 불렀다.<중략>
우리 동방은 기자箕子로부터 지극하고 끝없는 은혜를 입었으니, 그 실제 행적을 집집마다 외우고 사람마다 익혀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선비들은 갑자기 질문을 받으면 명확하게 답변하는 이가 드물다. 이는 대개 여러 책들이 흩어져 있어 학문이 넓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두수 尹斗壽 공이 일찍이 중국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중국의 사대부들이 기자 箕子에 대해 많이 물었으나, 윤 공이 병으로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귀국 후 그는 경서, 역사서, 제자백가서들을 널리 참고하고, 사실과 성현의 논설은 물론 시인들의 읊조림까지 모아 책을 완성하고 이름을 『기자지 箕子志』라 하였다.
그의 노력은 참으로 근면했으며, 후학들에게 베푼 혜택 또한 지극했다. 그러나 잡다하게 엮여 있어 연대기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에 나 이이李珥는 주제넘음을 무릅쓰고, 『기자지 箕子志』에 수록된 내용을 몰래 발췌하여 한 편의 글로 요약하였다. 이를 통해 나라가 세워진 시작과 끝, 세계世系와 역년歷年의 수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이름을 『기자실기箕子實記』라 하였다. 여러 사람이 보기에 편리하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기자실기, 한국문집총간, 율곡전서, 栗谷先生全書卷之十四 ,雜著 >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어본 소리다.
그러나, 이율곡이 평양에서 주나라의 도읍이었던 서안시까지 얼마나 먼 길인지
알고나 있었을까?

역사를 소설로 그것도 중화소설로 만들어서
당당하게 내놓았던 이율곡
글재주는 뛰어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세계였을뿐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학자가 아니라 재주좋은 소설가였다.

사실은 무엇인가?

기자를 조선현에 봉했다.<사기>
노나라와 강태공을 봉할때 방 백리였다<맹자>

산서성 장치분지에 있었던 조선현을
수천리 떨어진 한반도 평양으로 끌어온 그 재주에 감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