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수행자의 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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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mis 곰파가 규모가 큰 사찰이어서 라다크를 찾는 방문자들이 빠지지 않고 찾지만 여기서 500m정도 높은 산에 위치한 고창파(Götsangpa)는 낯선 여행자가 단디 마음먹지 않고 찾아가기 어렵다. 고산병에 적응하지 못하고 올라가다가 낭패를 보기 쉽기 때문에 라다크로 떠나기전 잔뜩 겁을 먹었다. 그래서 레숙소 야산의 산티 스투파를 두어 번 오르면서 미리 체력을 단련하였고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생수 한 병, 당 보충 초코렛 한 뭉치를 주머니에 넣고 나섰다. 하지만 현지인이라면 30분이면 충분할 시간을 1시간 30분 정도 허그덕허그덕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 고창파에 도달했다.

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은둔 수행자로서 밀라레빠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고창파 스님(Götsangpa Gonpo Dorje, 1189-1258)은 낯설다. 그는 수행에 중점을 둔 상위 드룹파(Upper Drukpa lineage)의 창시자로 젊은 시절 노래, 춤, 스토리텔링, 곡예를 결합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한 잘생긴 유량 예술가였는데 불우했던 가정 문제와 인생의 고단함에 각성하여 불교에 입문하였고 밀라레빠를 추종하며 밀교 두타행을 실천하였다. 카일리쉬산의 흩어진 동굴에서 명상하는 은둔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발에 물집이 터질 때까지 구운 보리가루를 등에 지면서 노란 당나귀라는 애칭과 함께 스님이 된 뒤 고창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7년 동안의 은둔 수행으로 '고창의 남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힘들게 올라온 티를 내면서 문을 두드린 곳이 스님들의 식당인데 따뜻한 밀크티와 쿠키를 제공해 주셨다. 10여 분의 스님들께서 행사 준비에 바쁘셨고 내일 용수 보살과 관련된 법회를 준비한다고 한다. 여자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묵을 수 있어 스님들의 수행에 하루 종일 참여할 수 있지만 그러기엔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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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수행하던 동굴 위에 법당를 지었는데 크지 않고 아담하다. 법당을 들어서면 동굴 입구 한 쪽 벽에 스승의 계보를 묘사한 화려한 벽화가 있고 동굴로 들어가는 윗면에 스님이 남긴 손 자국이 패여 있다. 철저한 은둔을 지향했던 스님은 수행가에게 직접적이고 간단한 조언의 시를 남겼다.

외적인 안거(安居)는 고독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요. 내부의 안거는 조그마한 방에 머무르는 것이지요. 은밀한 안거는 매트 위에 머무르는 것이지요. 이거다 저거다 단정 짓지 않는 비이원(非二元)의 견해에 머무르십시오. 산란 되지 않고 올곧은 명상에 머무르십시오. 그리고 집착하지 않는 행위에 머무르십시오.
 
Outer retreat is to stay put in isolation. Inner retreat is to stay put in the retreat hut. Secret retreat is to stay put on the mat. Stay put upon the non-dual view. Stay put upon undistracted meditation. Stay put upon unattached conduct.

마음이 혼란하여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면 우선 관계로부터 떠나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안정 시킬 조용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몸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 앉아있을 자리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될까? 여기까지는 외적인 방편일뿐 명상가들 모두 이렇게 한다. 그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번뇌만 쌓인다. 왜 일까? 딱 잘라서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경계를 가르고자 하는 마음 씀씀이는 한편에는 폭력이 된다. 명상으로 마음은 단순해져야 하고 평온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탄트라 불교가 신비스럽기도 괴기스럽기도 복잡하게도 느껴지지만 그 수행의 가장 중심에 있던 스님의 조언은 이처럼 간단하고 명료하다. 마치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불교를 단 세 마디 행위로 요약한 칠불통계(七佛通戒)처럼,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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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해탈에 이르는 길은 선행이란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