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옥중서간 - (2)
"더 좋은 잔디를 찾다가 결국 어디에도 앉지 못하고 마는 역마(驛馬)의 유랑도 그것을 미덕이라 할 수 없지만 나는 아직은 달팽이의 보수(保守)와 칩거(蟄居)를 선택하는 나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마살에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며 바다로 나와버린 물은 골짜기의 시절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옷자락을 적셔 유리창을 닦고 마음 속에 새로운 것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는 준비가 곧 자기를 키워나가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한 그릇의 물에 보름달을 담듯이>, 1981.6.2 일자
최근에 나는 직업으로서 무슨 일을 할 지 결정했다. 주변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반응과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는 반응이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내가 그 직업을 가지는 순간 나의 가능성은 크게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의견에 비추면, 난 특출난 실력도 없는 사람이며, 달팽이의 보수와 칩거를 선택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나중에는 그 말이 묵직하게 내 머리를 때렸다. 내 나름 역마의 자세를 취하고 결정한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의 시각에서 나는 달팽이의 자세를 취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는 아직 실력이 없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나만의 '실탄'이 없다.
한 이틀 정도 곱씹은 것 같다. 정말 내 결심은 보수와 칩거의 결심이었을까. 내가 살아온 생활방식을 돌이켜보면, 그 사람들의 말도 일면 일리가 있었다. 그 직업을 가지게 되면, 나는 안주해버릴 것 같다. 내가 아는 지식 외에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일에 싫증을 내고, 나중에 아프리카에 가서 아이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겠다는 꿈을 굳이 이루지 않아도, 사람들의 사연을 읽어주는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의 인생에 만족해버릴 것만 같다. '정신승리'만이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되겠지.
그러나 지금은 역마의 삶과 달팽이의 삶이 과연 뚜렷하게 구분되는 삶인지 물어보게 된다. 오래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사람이 대체로 역마의 삶과 달팽이의 삶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낸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역마가 '이 잔디야말로 내 마생(馬生)에 다시 없을 최고의 잔디야'라고 믿으며 눌러앉아버릴 때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달팽이가 현재의 답답함과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진보하고 출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매 결정의 순간마다, '내가 이 결론을 내리기까지 충분한 조사를 하였는가', '나는 언제든지 내 결정의 미흡함을 인정하고 이를 수정할 용기가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용복 씨가 이야기한, 안락한 집에 거하면서도 매일 옷자락을 적셔 유리창을 닦고, 마음속에 새로운 것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는 준비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감정을 이성과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성에 의하여 감정을 억제하도록 하는, 이를테면 이성이라는 포승으로 감정을 묶어버리려는 시도를 종종 목격합니다. 이것은 대립물로서의 이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함으로써 야기된 오류입니다. 감정과 이성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크기가 같아야 하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낮은 이성에는 낮은 감정이, 높은 이성에는 높은 감정이 관계되는 것입니다. 일견 이성에 의하여 감정이 극복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실은 이성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높이에 상응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에 의하여 낮은 단계의 감정이 극복되고 있을 따름이라 합니다.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역시 감정이라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뜻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이성의 계발(啓發)입니다.
(중략)
각양의 세태, 각색의 사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모든 고통과 가난과 갈등을 인정하도록 하며, 그 해결에 대한 일체의 환상과 기만을 거부케 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자유, 즉 이성을 얻게 해줍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가슴들은 그 완급(緩急), 곡직(曲直), 광협(廣狹), 방원(方圓)으로 하여 우리를 다른 수많은 가슴들과 부딪치게 함으로써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칩거하고 있는 감정도 수많은 총중(叢中)의 한 낱에 불과하다는 개안을 얻게 하고 그 협착한 갑각(甲殼)을 벗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사건에 매몰되거나 각자의 감정에 칩거해 들어가는 대신 우리들의 풍부한 이웃에 충실해갈 때 비로소 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벽 속의 이성과 감성>, 1983.3.15 일자
나는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이성보다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이성은 감정보다 약하다고 믿는다. 다만 이성을 계발하여 감정의 영향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신용복 씨가 제시한 이성의 계발방법은 기실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면 실천하기 어렵다. 지금 생각나는 구체적 방법은 언론사별로 신문 비교하며 읽기, 폭넓은 독서하기, 매 수업시간에서 할당된 리딩을 하기 등 이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무지한 자의 감정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대표적이다. 환경미화원 분들의 정규직 전환 문제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의 정규직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아르바이트라도 일자리를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세대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이키 매장에서 아동착취를 하는 것에 분노하면서도, 사실 그 일자리가 노동자들에게는 정말 좋은 일자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백양누리에 왜 이렇게 식당이 없을까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식당들이 들어설 경우 손해를 보게 될 신촌역 주변 식당들을 생각하지는 못했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저 내용들이 정확한 것인지 몰라 부끄럽다. 나는 내가 아는 지식의 수준에서 발생한 내 감정에 매몰되어버리기 일수였다. 내 무지와 협착한 감정은 정말 죄다.
나도 이성의 계발이 필요하다. 누구가를 돕고 싶다는 내 감정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제대로 된 이성적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