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유산 (손에 피묻힌 이야기)

in #familyheritage7 years ago (edited)

방금 집에 돌아왔습니다. 인터넷이 없는 환경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을 오랫동안 자랑으로 여겨 왔는데 집에 오자마자 스팀잇에 들어 오고, 마지막으로 글을 올린 것이 4일 전이라는 것에 마음이 급해져 얼른 글쓰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사실 순례길 이야기를 가장 쓰고 싶은데... 이건 천천히 되새김하며 써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대신 ‘순대길’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순대를 만들고 지금 돌아온 것입니다. 저희 엄마의 친정이기도 한 춘천 큰이모댁에 다녀왔습니다. 가정에서 순대를 직접 만드는 것이 흔치는 않을 것 같은데, 외할머니께서 이북에 계실 때부터 대대로 만들어온 것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큰이모가 해오시다가 이제는 제가 전수받게 된 것입니다. 전수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고 일손을 도와 드린 정도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순대 만드는 법을 무조건 배워 오라고 몇 년 전부터 애를 태우셨거든요. 춘천 순대가 좀 맛있습니다. 돈을 많이 준대도 비슷한 순대를 파는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만들어 먹는 것도 있습니다. 하는 수 없다고 한 것은 품이 여간 많이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택이긴 해도 가정집에서 만드는 것치고는 꽤 본격적인 것이 돼지머리부터 돼지 피까지 모든 재료를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합니다. 허파와 간을 비롯한 내장과 소를 담을 소창, 대창을 밤새 찬물에 담그어 핏물을 뺍니다. 돼지머리와 내장은 된장과 각종 채소와 과일을 넣은 솥에 함께 삶고 소창과 대창은 소금, 밀가루로 박박 씻고 뒤집어서 또 씻고를 반복합니다. 돼지 선지는 핸드블렌더(도깨비 방망이)로 응고된 것을 풀어준 뒤 그 안에 속재료를 넣습니다.

큰 대야에 담긴 돼지 피 속에는 찹쌀(미리 익혀 넣기도 함) 이 들어가고 익힌 배추와 숙주 썬 것, 썬 대파와 쪽파, 간마늘과 생강 등이 들어갑니다. 소금, 후추, 간장, 참기름 등으로 간도 해주어야합니다. 그리고 돼지피와 잘 섞어주면 됩니다. 아, 순대 레시피를 쓰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이 속재료를, 한쪽 끝을 실로 묶은 소창과 대창에 넣은 뒤 다른 한쪽마저 실로 묶어 삶아 주면 순대가 됩니다.

큰이모와 큰이모의 며느리(저는 언니라고 부릅니다), 저 셋은 돗자리 위에 앉아 손에 피를 흥건히 묻혀가며, 여기저기 튀겨가며 내내 순대를 만들었지요. 속재료를 준비하는 것이나 서서 일할 때는 문제가 없는데 얼음장 같은 물에 소창, 대창을 씻고 뒤집는 것과 목욕탕 의자 같은 것에 앉아 작업하는 것이 고되더군요.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일당 마이너스 백인 저희 엄마도 춘천에 함께 모시고 갔는데 우리도 안한 앞치마를 목에 거시고 쇼파에 우아하게 앉아 실을 한올한올 뽑아 주셨습니다.

핏물 빼기, 재료손질부터 이틀에 걸쳐 완성한 순대는 솥에서 삶는 중에 절반 가까이 터져서 큰이모부가 욕을 한바가지 잡수셨습니다. 솥 담당이셨거든요. (문득 @sobbabi 솥밥님 생각이 납니다. 순댓국과 뗄 수 없는 @juheepark 님 생각도 나네요.) 대신 순댓국의 국물로 쓰일 육수는 일품이 되었습니다.

밤이 되어서야 순대 삶기가 끝나고 열심히 일한 우리는 윤기가 좔좔 흐르는 순대를 그 자리에서 바로 썰어 손으로 집어 먹었습니다. 씹을 때마다 고소하고 기름진 풍미가 뿜어져 나오는 돼지 대창과 함께 쫀쫀하게 씹히는 찹쌀, 따끈한 선지에 촉촉하고 신선한 채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어요. 염통은 또 얼마나 쫄깃하고 고소한지 어린 조카들이 머릿고기, 오소리감투와 함께 환장을 해서 먹었습니다. 정체를 알았으면 과연 먹었을까 싶네요. (송아지 고기라는 말에 속아 개고기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요즘 음식을 많이 못었먹는데 저야말로 내 창자가 순대인지, 순대가 내 창자인지... 할 때까지 쉴 새없이 먹었습니다. 왜 안배부르죠. 왜 안질리죠.

뜨거울 때 얼른 먹고 싶어서 사진을 이쁘게 찍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네요. 글이든 사진이든 기록을 남기는 데만 급급.. 죄송합니다.

그리고 익일인 오늘, 망원동에 사시는 작은할아버지와 요양원에서 지내시는 외삼촌도 춘천 큰이모댁에 오셨습니다. 모시기 힘든 분들인데 순대 잡수러 오셨습니다. 일과 병환, 해외체류 등으로 오지 못한 친척들이 더 많았지만.. 가족을 한 데로 묶어준다는 것에 새삼 음식의 힘과 의미를 깨닫습니다. 가족을 위해 음식을 한 것인지, 음식을 위해 가족이 모인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이북에서 피난을 오셔 자리잡아 벌써 4대의 추억이 깃든 춘천 집도 곧 팔리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사정때문이라 어쩔 수 없지만, 마치 우리들의 유년시절과 헤어지는 것 같아 무척 아쉬움이 듭니다. 그래서 이번에 만든 순대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 순대가 뿔뿔이 흩어진 우리 가족을 한 데 모아주고, 이 음식 속에 우리의 추억과 역사가 계속 살아서 유산처럼 전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spring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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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어 보입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군요.
채산성 생각하면 사업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 ㅎㅎㅎ

저희도 만들 때마다 '이건 못판다' 고 해요. 귀해서 못판다는 뜻이 아니라... 팔려면 정말 비싸게 받아야할 것 같은데 그 가격이면 사람들이 안먹고 만다는 거죠 ㅎㅎㅎ 가족끼리 이 맛이 그리울 때나 간간히 만들 듯 합니다 :)

아쉽네요. 그래도 이곳에서 이 글을 통해 영원히 기억될 거란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블록체인의 장점이지요. 제 뱃살을 통해서도 꽤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오... 피순대인가요! 창이 되게 두꺼워보이는데 엄청 먹어보고 싶습니다 ㅇㅠㅇ(주륵). 개고기랑 염소고기가 비슷하다 듣고 보니 떠오르는군요. 두 고기의 맛이... 봄님이 순대 장사하신다 하시면 한 개업 12시간 전에 캠프 칠 의향 있습니다.

이북 음식이라고 하니 김치밥이 생각나네요 ~_~ 13년 전에 어머니가 배워오셔서 먹어본 후로 1년에 한 번은 해먹습니다. 헤헤.

마아냐님 지난번엔 저희집 냥이로 취직하시겠다고 한 것 같은데 이번엔 캠프까지 ㅋㅋㅋ 장사하면 저 한접시에 적어도 2만원은 받을 거예요. 그래서 장사 못함 ㅋㅋㅋ 피순대라고 하기엔 찹쌀이 삐질 것 같아서 이북순대라고 부릅니다 ㅋㅋㅋ

그리고 저 김치밥 사랑합니다(돼지고기와 양념장 필수) ㅠㅠㅠ 그런데 어머님 열심히 배워오셔서는 왜때문에 1년에 한번 ㅋㅋㅋ 그리고 개고기랑 염소고기랑 제 경험상은 맛이 아주 다르던데요!!!

20스달로 합의합시다. 생각해보니 제가 말을 많이 뱉었군요. 큰일 큰일... 나중엔 노예도 자처할 듯...

돼지고기 들어간 김치밥과 양념장은 역시 +_+bbb 1년에 한 번 뿐인건 제가 기억을 잘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번뜩 떠올라서 부탁하기 때문입니다... ㅋㅋㅋ 마침 지금 본가에 와있어서 부탁드려야겠어요 -ㅅ- ㅋ

제 기억엔 탕에 들어간 고기는 맛이 비슷했었는데요!? 수육 쪽은 좀 달랐지만 특유의 힘없는? 부드러운? 육질과 향이 비슷했었는데.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꼬릿함의 흔적도... 진실이 궁금해졌어요 ㅎㅎㅎ

어..찾아보면 이미 노예 자처하신 것 있을 것도 같고 ㅎㅎㅎ 이왕이면 김치밥 만드는 법 전수받으시는 건 어떨까요. 마아냐님이 원하실 때 언제든 드실 수 있도록! 봇도 뚝딱 만드시는 분이니 밥도 문제 없을 것 같은데요 +ㅁ+

저 지금보니 염소고기를 양고기로 착각했네요. 염소고기는 맛도 잘 생각이 안나요. 안먹어 본 거 같기도 ㅎㅎㅎ 염소치즈는 정말 좋아합니다!! 이러면 안되지만 마아냐님 설명 보고 있자니 보신탕 생각이 나는군요. 이러면 안되는데...ㅋㅋ

아직 아무에게도 노예를 자처한 댓글은 없습니다! 아.. 어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겠다는 선언은 했었네요. 그러고보니 제가 레시피를 전수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못했네요! 흡... 보신탕집은 예전엔 주변에 있었는데 요즘은 찾기도 힘들어서 ㅠㅜ... 양고기와 염소치즈는 제가 죽기 전에 먹어봐야할 음식 목록메모에 추가해놓을게요 -ㅅ-b

죽기 전에는 드실 수 있을 거예요.. 만약 때가 왔는데도 ㅠㅠ 못드실 것 같으면 제가 싸갈게요 ㅠㅠ (제가 더 오래 살 거 니까요..?)

오... 못먹고 죽을 일은 없겠군요... 그리고 오래 사시려면 청결이 중요합니다. (속닥속닥) 특히.. 으 으읍.. 읍..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부러 이렇게 면역력 강화시켜서 오래살 거거든요?

순댓길..ㅋㅋ 센스에 이마를 탁치네요. ㅎㅎ

굉장히 이색적이네요. 김장하듯이 모여서 순대를 만들다니. ㅎㅎ 바로 익혀서 먹는 음식은 진짜 최고의 맛일 텐데. 큼. ㅠ

진짜로 이마 탁 쳤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짜로요?? ㅎㅎㅎ

외할머니 살아계실 땐 손님 초대할 때마다 만들고는 했는데 큰이모도 편찮으시고 품이 많이 들어서 이제 저 순대는 거의 살아있는 화석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화석이란 표현 언제 쓰는 건지 잘 모름...) 그런데 정말 너무 맛이 있어서 파는 데만 있다면 돈주고 사먹고 싶어요 ㅠㅠ

설마 진짜 쳤겠습니까. ㅋㅋ 이런 게 문학적 표현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
밖에 서 많이 사 먹는 음식은 다 이유가 있음. ㅋㅋ

순대는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살아있는 화석이 될 수 없지 않을까요?ㅋㅋㅋ

와 거짓말쟁이였네...ㅋㅋㅋ 순대는 제 뱃속에 살아있는 걸로...

와 전 살면서 저런 순대를 먹을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몸은 고되지만 행복과 추억을 잔득 담고 오셨네요 ~ 따뜻하게 잘 보고갑니다🤗🤗🤗

전에 수요미식회에 나온 순대중에 비슷한게 있기는 하더라구요. 몸은 정말 고되었어요. 춘천 왕복하는 것부터.. 청춘이 꺾이는 게 느껴져요 엉엉 ㅠㅠ

그래서인지 더욱 더 진솔하고 현장감 넘치는 사진들이에요.
어제 저도 순대를 먹었어요.
가끔씩 막 땡길 때가 있더라구요. :)
이제 저 순대는 스필님이 전수받지 않으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건가요- 꼭 전수받아주세요! 😎

사실 제목에 ※사진 주의 라고 달아놨었어요. 너무 날것의 사진들이 많아서 ㅎㅎㅎ 송블리님도 어제 순대 드셨군요!! 순대는 이상하게 가끔 막 땡겨요! 왜 그럴까요? 저는 왠지 임신하면 춘천 순대가 당길 것 같은데 저 작업을 해야한다고 하면 자신없네요 ㅠㅠ ㅎㅎㅎㅎ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근무한 쉐프님이 손수 만드는 춘천순대!!

제 입안에 가득한 침 어찌하리오까...

음식과 가족.. 참 좋은 주제 같아요.
역시 봄밭님은 정겨워요~~~

입안에 가득한 침은... 메가님처럼 웃을 때마다 조금씩 흘려주시면 싹 사라질 듯 합니다 :) 음식과 가족이라고 말씀하시니.. 그야말로 제게 가장 소중하고 제일 사랑하는 것들이네요! 저도 언젠가 제 쥬니어에게 음식하는 법을 물려줄 날이 오겠죠? :)

ㅋㅋㅋ 별님 웃을 때 침을 조금씩 흘려주시나요?
역시 사람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완벽한 모습을 숨기려 애를 쓰시는군요...

저한테 음식 가르쳐주셔도 되는데.... :-)

메가님의 무엇이든 다 미화시키고 정당화시키시는 라동무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ㅠㅠ 정말 별님 팬클럽 회장님 다우십니다...!! 그럼 라동무님은 제 쥬니어와 같이 음식 배우시는 걸로... (언젠가는 생기겠죠...)

사진에 소양강 막걸리가 안보입니다요.

아........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군요!!! ㅎㅎㅎ :)

요즘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저도 어릴 적에 동네에서 순대 만드는
광경을 직접 본 일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시골에서 잔치를 하면
키우던 돼지를 잡고 고기를 삶고
어르신들이 순대를 만들었습니다.
소를 만드는 과정은 본 기억이 없고
유리병을 깨서 대창에 넣고 소를 넣어
지푸라기로 묶어서 큰 손에서 익혀면
애 어른 없이 먹던 순대처럼 길게 남은
잔치집의 기억

아마 님의 오늘도 거기 모이셨던 분들 모두
공유할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jjy 님 :) 그것도 정말 소중하고 따뜻한 기억입니다. 대학 다닐 때 우리나라 이곳저곳에 남아있는 풍습과 의례를 찾아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제사나 축제, 잔치가 있으면 꼭 술을 만들고 돼지를 잡더라구요. 이제는 사라져 가는 모습이라 아쉬웠는데 @jjy 님의 기억 속에 그 역사가 남아있으니 참 다행이고 귀합니다.

저희는 소를 넣을 때 플라스틱 병을 잘라 입구를 깔때기 처럼 썼는데 당시엔 그것이 없으니 유리병을 썼겠습니다. 동네 잔치에 마을에서 함께 만드는 순대라니.. 이제는 특별하고 드문 것들이 한 때는 생활에 녹아있는, 자연스러운 것들이었을 거라는 사실에 문득 세상이 빠르게 변해감이 아쉽습니다. 소중한 기억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것이구만.. 아.. 이런거 한번 먹으면 시판 순대가 얼마나 같잖아보일지...
레시피 잘 배워놔. 장사하자. ㅋㅋㅋㅋ

한쪽에선 순대, 한쪽에선 김부각 ㅎㅎㅎㅎㅎ 그런데 저거 만들었다고 지금 온몸이 쑤셔서 ;ㅁ; 뭐든 남이 해주는 게 짱인 듯 ㅎㅎㅎ

돈 받고 만들면 힘이 안들지도 몰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