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2025.5.7(수)

밤이 늦었소. 자러 갑시다. 그 '다른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친구여, 당신은 그것을 배울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당신은 벌써 그것을 아는지도 모르지요. 나는 학자가 아닙니다.나는 말을 할 줄도 모르고, 사고할 줄도 모릅니다. 나는 다만 들을 줄만 알고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지요. 내가 만약 그것을 말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면, 아마도 현자가 되었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저 뱃사공일 뿐입니다. 내 일은 사람들을 태워 강을 건네주는 것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을, 아마 몇 천의 사람을, 나는 건네주었지요. 그들 모두에게 이 강은 여행길에 마주친 장애물일 뿐, 다른 그 무엇도 못 되었지요. 그들은 돈과 장사를 위하여, 결혼하기 위하여, 순례하기 위하여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은 그들의 길에 방해가 되었고 뱃사공은 그들이 속히 방해물을 넘어가게 하려고 거기에 있었던 것이지요. 몇 천 사람 중 몇 사람, 극소수의 사람, 넷 또는 다섯 사람한테는 이 강이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강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은 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내게 그랬던 것처럼 강은 그들에게 신성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 이제 쉬러 갑시다. 싯다르타.
농담이 아니라, 내가 발견한 것을 말하는 거야. 지식은 전달할 수 있어도 지혜는 전달할 수 없어. 우리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고, 지혜롭게 살 수 있고, 지혜의 힘으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지혜를 써서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지혜를 말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어.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미 청년이었을 때부터 여러 차례 예감했던 사실이고, 스승에게서 떠나게 만든 것이었지. 나는 한가지 사상을 발견했어, 고빈다. 자내는 또다시 농담이나 어리석은 말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닌 최고의 사상은, 모든 진리는 그 반면도 똑같이 진리라는 거야! 따라서 진리는 그것이 단면적일 때에만 발음이 되어 나오고 언어로 감쌀 수 있지. 사색할 수 있고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단면적인 것이고, 반쪽일 뿐이라, 전체가 못 되고 원이 못 되고 단일의 것이 못 되는 거야. 그러니까 지존 고타마께서 세계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에, 세계를 윤회와 열반, 미망과 진실, 번뇌와 해탈로 나눌 수밖에 없었던 거지. 달리는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가르치려면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하지만 세계 자체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존재자는 절대로 단면일 수 없지. 어느 인간이나 어느 행위가 완전히 윤회이거나 완전히 열반일 수는 없어. 어느 인간도 완전히 성자이거나 완전히 죄인일 수는 없어.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시간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망에 빠져 있기 때문이고. 시간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야, 고빈다. 나는 그것을 문득 체험했지. 시간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세계와 영원 사이의, 번뇌와 행복 사이의, 악과 선 사이의 틈도 역시 미망일 테지.
들어보게, 사랑하는 친구여, 잘 들어봐! 나나 자네 같은 죄인은 지금은 죄인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범이 될 것이고 언젠가는 열반에 이를 것이고 붓다가 될 거야. 그런데 이 '언제가는' 이란 것이 미망이고, 비유에 지나지 않는 거란 말이지. 죄인은 부처가 되는 도중에 있는 것이 아니야. 우리의 사고로는 달리 어떻게 표상할 수 없겠지만 죄인은 발전해가는 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속에, 지금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있는거야. 죄인의 미래는 이미 모두 죄인 안에 있는 것이지. 그러니 자네는 죄인 속에서, 자네 속에서, 모든 사람들 속에서, 형성되어 가고 있는, 숨어 있는, 가능한 모든 부처를 존경해야 해. 내 친구 고빈다여, 세계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것으로 천천히 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야. 세계는 순간마다 완전한 거야. 모든 죄는 이미 그 안에 은총을 품고 있어. 모든 아이 속에는 이미 백발노인이, 모든 젖먹이 속에는 이미 죽음이, 모든 죽어가는 존재 속에는 이미 영생이 깃들어 있지.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길을 얼마나 걸어왔는지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도적이나 노름꾼 속에도 부처가 있고 브라만 속에도 도적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지. 시간을 버리고, 모든 있었던 생, 있는 생, 있을 생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깊은 명상 속에 있어.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선이며, 모든 것은 완전하고, 모든 것은 범인 거지. 그렇기 때문에 내게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으로 보이고, 죽음은 삶으로, 죄악은 성스러운 것으로, 지혜로움은 어리석음으로 보인다네.. 모든 것은 그래야만 해. 모든 것은 그저 나의 동의, 나의 호의, 나의 다정한 이해를 요구할 뿐이니까. 그러니 모든 것은 선이야. 나를 고무시켜주면서 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나의 육체와 나의 영혼으로 나는 죄악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네. 쾌락과 물질적 탐욕, 허영이 필요했고, 절대 금기인 자포자기까지도 필요했지. 반항을 포기하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세계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현실 세계를 내가 희망하고 내가 상상해낸 어떤 세계, 내가 만들어낸 완전한 세계와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며 기꺼이 그 세계에 속하기 위해서 말이지.
여기 돌이 하나 있네.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흙이 되겠지. 그리고 그 흙에서 나무가 자랄 거야. 또는 동물이, 또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 예전의 나라면 '돌은 돌일 뿐이다. 돌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미망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이 돌도 변화의 윤회를 거치는 동안에 인간이 되고 정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돌에도 가치를 부여한다'라고 말했을 거야.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나는 이렇게 생각해. 돌은 돌이요, 또한 동물이요, 신이요, 부처라고 내가 이 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언젠가 이 돌이 이런 또는 저런 물건이 될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돌은 태초부터 영원히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이 날 이 시간에 돌로서 내 눈에 비친다는 것,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돌을 사랑해. 이 돌의 줄무늬와 움푹 팬 곳 하나하나에서, 누런빛에서, 잿빛에서, 딱딱함에서, 내가 두들기면 나는 울림에서, 돌의 표면의 습기나 또는 건조함에서, 그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보는 거야. 물도 기름이나 비누 같은 촉감을 가진 것이 있고, 나뭇잎 같은 촉감을, 또는 모래알 같은 촉감을 가진 것도 있지. 이렇듯 제각기 자기만의 특징을 가지고 자기만의 특유한 방식으로 옴을 부르는 거야. 모두가 범이고 동시에 물이며, 기름 같거나 비누 같은 것이지. 바로 이 점이 내 마음에 드는 점이고, 내 눈에 신기하게 비치는 점이며, 숭배할 가치를 지니게 하는 점이라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세. 말이라는 것은 내밀한 의미에 별로 이롭지 못하니. 말로 표현되어 나온 것은 무엇이든 늘 조금씩은 다른 것이 되어버리지. 조금은 변조되고 조금은 어리석어지게 마련이야. 하긴, 그 점 역시 대단히 좋은 것이야. 어떤 인간에게는 보물이며 지혜로운 것이 다른 사람한테는 어리석게 들린다는 것, 그 점을 나는 좋게 생각하고 있고, 잘 이해하고 있네.
소설 데미안으로 유명한 헤르만헤세가 쓴 '싯다르타'.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헤르만헤세가 썼다는 사실에 관심이 갔다. 이 책의 제목만 보면 붓다의 전기로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이건 분명히 헤르만헤세 쓴 창작소설이다. 헤르만헤세는 불교사상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마지막 싯다르타와 고빈다와의 대화 부분이 하일라이트라고 생각되는데, 그 글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져서 그 부분만 여러 번 읽었다. 중첩된 상황. 중첩된 의지. 선과악의 중첩, 좋고나쁨의 중첩, 해탈과번뇌의 중첩.중첩된 행위. 중접된 에너지. 이러한 삶이 계속 순환한다. 명민한 정신으로 중도(최고의 선택)를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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