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나태로운 미래 박람회

20세기 소년들은 과학기술이 통치하는 미래를 상상했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유토피아에 살게 할 거라고. 엑스포는 인간의 기술적 유토피아에 대한 자랑과 염원, 상상의 시작이었다. 자국의 기술을 세계에 알리고 미래의 이상향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보여주는 거대한 테크 국가들의 쇼케이스.
그러나 태양의 탑은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인간이 인간을 잊는 미래는 진보가 아니라며. 태양의 탑을 조각한 '오카모토 타로(岡本 太郎)'는 과학기술이 승리하는 미래 낙관주의에 반발했다. 그리고 그 탑은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상징물이 되었다. 주최 측은 무슨 의도로 이 탑을 상징물로 허가했을까?

미래 기술에 보내는 가득한 낙관적 시선을 의심하고 비판하며 인간의 원초적 무의식과 본능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오카모토 타로는 인류의 무의식에 대해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예술은 내면의 에너지와 무의식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행위라고 정의한 이 조각가는, 1970' 오사카 엑스포의 공식 슬로건인 '인간의 진보와 조화'에 대해, '조화는 나태'라며 반박하고, 모순과 충돌, 부조리 속에서 진정한 생명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무의식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고 주장한 이 조각가의 철학은 '우라사와 나오키(浦沢 直樹)'의 명작 <20세기 소년>에서 그 무의식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로 구현되기도 했다.

이런 상징물을 받아 안을 수 있는 힘이 1970년대의 일본에는 있었나 보다. 서구인들이 이 폭발적 에너지로 성장하는 재팬 인베이젼의 미래를 두려워하곤 했으니. 예술가들은 그 무의식의 억압이 표출될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나태로운 조화는 과학기술적 진보에 대한 낙관이 키워낸 거품을 방관했지만.
거품이 꺼진 일본은 나태로운 조화로 잃어버린 시대를 방어했다. 그들은 임금을 동결하고 일자리를 나누는 방식으로 세계 경제에 대응했다. 신자유주의가 신제국주의적 침공을 강타하던 시대에, 열도인들은 소비심리와 지갑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大 옥쇄 투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임금도 물가도 오르지 않는 이상한 조화를 이루어낸 이들은 결국 서서히 가난해지고 있는 줄도 모르는 비어커 속 개구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고 다시 열린 오사카 엑스포에서는 어떤 기술적 낙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열도의 폭염과 이상한 운영 방식으로 인해 볼 수 있는 전시관 수가 한정되어 있었지만, 박람회장 어디에서도 미래에 대한 흥분과 기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관람이 디스플레이 영상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것은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자 또한 미래상이다. 작은 스마트폰 안에서 구현되는 미래 말이다. 더 나아가 봐야 LED 디스플레이로 둘러쳐진 가상현실의 공간 속에서나 진보와 혁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손으로 만지던 것을, 굳이 증강현실, 가상현실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이상한 미래 말이다.

'이게 혁신이야? 미래야?'
라고 불평을 늘어놓기에는 태생이 오사카 경제의 부흥을 위한 카지노 유치가 목표였다는, (평균과 조화로 묶어놓은 사회에서 돌파구는 도박뿐) 이 무늬만 엑스포에서 기대할 것이 없기도 했다. 현지인들조차 남의 마을 잔치에 돈과 시간, 체력을 써가며 뭐 하러 가냐는 조소가 가득했다니. 그럼에도 넘치는 건 사람이고, 그나마 7월의 폭염과 대지진의 예언 때문에 관람객이 줄었다는데도 어딜 가나 길고 긴 대기 줄을 서야 했다.

게다가 무성의한 전시는 참으로. 나름 자체전시관을 준비한 국가들조차, 이게 대체 이 나라랑 무슨 상관이지 싶은 전시 일색이고, 그나마도 어린이 과학관에서나 봄 직한 콘텐츠 수준이었으니. 심지어 통합 전시관에 입주한 개별 국가들은 국가홍보영상이나 틀어놓던가, 토속품 몇 개를 팔던가, 심지어는 일본이 투자해 줘서 마지못해 왔다는 듯 대통령의 사진과 일본 총리가 악수하는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걸어 놓기까지 했다. '돈 줘서 고마워. 나 참가 했으니 됐지?' 생색을 내는 것도 참.

무성의한 미래
20세기 소년들이 상상한 유토피아는 화면 속에서나 구현되고, 예술가들이 경고한 디스토피아는 오히려 무성의하고 따분한 미래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박람회장을 거닐다 보면 세계인들의 표정에서 지루함을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긴 왔는데 새로운 것이 없고, 심지어 무성의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엑스포가 바로 인류가 경험할 미래가 아닌가 이 말이다. 너의 미래에 대한 기대처럼 말이다.
차라리 20세기 소년들이 상상한,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가는 사이비 파시즘의 미래가 그나마 활력이 있어 보일지도. 무의식의 억압이 표출되는 기형적 사회보다 못한, 평균과 조화의 수호로 이룩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비이커 속 개구리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라면.

'조화는 나태라고!' 일침 한 태양의 탑 조각가의 말이 새삼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피지컬을 놓고 가상현실로 폭주하는 기술의 진보가 결국 할 일 없는 무료한 인간의 미래를 현실로 가져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류의 노동을 대체한 미래에, 그러니까 놀 줄 모르는 인간들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의 진화는 지옥이 아닌가? 지루해 죽는 지옥.

그나마 볼만한 것은 건축물들이었다. 총면적 61,035.55m²로 전체 둘레가 약 2km에 달하는, 전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이라는 'Grand Ring(大屋根リング, 오오야네 링)'은, 박람회장을 나무 기둥만으로 둘러싼 거대한 구조물로 관람객들이 그나마 뙤약볕을 피해 대기하고 쉴 수 있는 이상적인 구조를 구현해 내었다. 못 없이 나무로만 엮었단다. 이에 접하여 지어진 각국의 전시관 역시 빈약한 내용물을 대체하려는 듯 화려하고 독특하게 지어져, 특히 조명이 들어오는 야간에는 나름 보는 맛이 있었다.



무료한 인간이 머물 곳은 어디인가? 그나마 박람회의 하이라이트라던 수중 분수쇼조차 더러운 오사카만의 수질 때문에 취소가 되어 버렸다. 레지오넬라균이 기준치에 20배를 넘었다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는 건 탄사가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석양에 물든 박람회장의 전경이었으니. 그랜드 링 난간에 앉아 그나마도 취소 돼버린 분수쇼장의 전경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는 관람객들의 한가함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다.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아무런 기대가 없는 인류. 내용 없이 가상뿐인 버벅대는 과학기술은 인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데, 언제나 변함이 없는 하늘의 석양과 더위를 잊게 해주는 선선한 바람만이 위안이 되는 세상 말이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념무상에 빠져드는 해탈한 미래 인간들이라니. 인간과 기술이 이룬 조화로운 미래가 이것이라면, 조화는 나태라고! 그러니 인류의 미래는 무료라고. 노동에서 해방된 무료한 인간들의 미래.


지지고 볶고 싸우고 투쟁하고. 나태하지 않은 인간의 역동적인 일상을 애써 무시한 열도의 현재는, 그대로 무료한 채 가라앉을까 두려워 지구 어머니가 애써 지진과 쓰나미로 CPR(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하지만 조화로 버텨낼 수 있는 일상은 축복이기도 하니. 외침이 없고 내우외환이 통제의 수준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대지진과 쓰나미에도 용케 조화로운 일상을 애써 유지해 온 이 나라가 이제 어떻게 달라질지. 버틸 만큼 버텨낸 조화의 끝이 그간 억압해 왔던 무의식의 충동을 어디로 펼쳐낼지 우려스럽고 기대가 되기도 하는데. 20세기 소년들이 '친구'를 우상화하여 뒤틀린 폭력으로 과거를 풀어내는 디스토피아로 폭주할지, 조화 뒤에 축적된 에너지를 인류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한때 세계를 두렵게 했던 재팬 인베이젼의 진격상으로 재현할지. 인생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며, 여는 문마다 다이너마이트가 매달려 있었다는 마가 황제가 재림한 세상에서, 조화로 버티는 일상의 지속이 과연 가능할지.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는 태양의 시대에 더 이상 그림자 뒤로 숨을 숲이 없음을 열도의 이웃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위즈덤 레이스 + City100] 103. 오사카 만국박람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