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선제타격계획에 대한 분석과 해석 - 제1단계 작전을 중심으로 (17)
(열일곱번째)
김일성은 서울 진입 하루 전 6월 27일 제105전차여단의 임무를 변경하여 서대문형무소, 방송국, 중앙청 등 정치적으로 상징성 있는 건물을 먼저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14) 김일성은 한강교 점령이 갖는 군사적인 중요성을 간과했다. 김일성은 6월 26일에는 한강교 점령을 강조했으나 27일에는 생각을 바꾸었다.
각주 14) <조국해방전쟁사(1)>, 1972, pp.155~157. 김광수, 전게서, pp.164~165.
북한군이 서울 점령 즉시 또는 사전 침투한 부대가 한강교를 점령했다면 한강 이북에 있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섬멸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이후 작전도 역동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15) 북한군의 적시적인 한강교 점령 실패는 전술적으로는 밀어내기식 공격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전략적으로는 국군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였다. 만약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할지라도 국군이 한강방어선을 형성하기 전에 즉시 교두보를 확보했다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한강 방어선 형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국군은 전투력을 정비하여 5일 동안 한강선을 방어함으로써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 및 전개할 시공간적 여건을 조성했다.
각주 15) 북한군이 6월 28일 새벽 미아리방어선을 돌파 후 한강교가 폭파되기 전에 점령할 수 있었느냐는 더 논의가 필요하다. 국군은 6.25 초기전투에서 임진강교와 모진교를 폭파하지 못함으로 인한 전술적인 과오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6월 26일부터 한강교 폭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하더라도 북한군이 서울 진입 즉시 한강교 점령을 시도했다면 전쟁 양상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당시 한강교는 한강대교(인도교), 경부 복선화 철교, 경인 상하행선 철교, 광진교(인도교) 총 5개의 교량이 있었다. 그러나 2개 철교는 완전히 폭파되지 않아 후에 복구되어 북한군 전차의 도강을 허용했다. 육군군사연구소, <6.25전쟁의 실패사례와 교훈>, 2013, pp.84~85.
@greentree, 정말 흥미로운 분석입니다! 김일성의 결정이 전쟁의 흐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돋보입니다. 특히 한강교 점령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한 점을 지적하며, 만약 북한군이 초기 단계에서 한강교를 점령했더라면 전쟁 양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각주를 통해 제시된 근거들은 주장의 신뢰성을 높여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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