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4권(11)

9월 30일 미 극동군 사령관이며 국련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원수는 적 사령관 김일성에 대하여 항복 권고문을 발표하였고 북한 괴수 김일성은 이에 대한 대답 대신으로 38 이남의 모든 괴뢰군에 대하여 가능한 한 무기를 가지고 이북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30일 오후 아 국군의 38선 월경 명령을 하달하였다.
국토 통일을 이룩하고자 3천만 민족과 더불어 이 명령을 고대하고 있던 아군은 10월 1일 제3사단이 38선을 넘어 10월 2일에 양양, 간성, 10월 4일에 고성, 10월 5일에 장전을 통과하여 10월 9일에는 원산 남단에 이르렀다. 퇴로를 잃은 적 제5사단 부사단장은 양양 부근에서 아군에게 생포되었다. 그리고 수도사단은 3사단과 병행하여 인제 고저를 거쳐 10월 9일에는 신고산에 도달하여 양 사단은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하였고, 11일부터는 원산 비행장의 사용이 개시되었다.
또한 중부 전선에서는 제2군단은 제7, 제8사 양 사단이 화천, 김화, 평강, 이천을 거쳐, 제7사단은 성천, 순천으로 진격하고 제8사단은 양덕 방면으로 분진하여 덕천으로 진출하였으며 제6사단은 서울에서 가평, 화천을 거쳐 양덕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한편, 서부로 진격하는 국련군 부대는 미 제9사단으로 서해안을 북상시키고 제1기갑사단을 최선두로 하는 미 제1군단을 경의 본선과 신계, 시변리 선으로 진출하게 하였으며, 이 부대들은 10월 13일에 금천, 16일에 신막, 사리원을 통과하여 18일에는 평양 남방 19㎞ 지점에 박두하였고, 동남방 율리에 도달한 아군 제7사단과 함께 평양에의 양면 공격을 개시하였다. 약 2만의 신병 보충을 받아 평양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적 중장 최인은 이날 수천 명의 병력을 남기고 철원, 평강, 사리원 방면에서 북상한 병력과 합류하여 청천강 이북으로 달아났다. 10월 19일 19:00 아 국군 제1사단을 선두로 하는 국련군 부대는 평양을 점령하였다. 10월 20일 평양 북방의 숙천, 순천 간에 미 제11 공정사단의 제187연대 약 4천 명이 낙하산 작전을 전개하고 21일 다시 숙천에 낙하한 1,800명의 우군과 함께 평양 북방으로 도주하는 잔적을 일망타진함과 동시에 아군의 급속한 진격에 박차를 가하였다. 맥아더 원수는 이 낙하산 부대가 작전을 실시하던 날 워커 중장에게 전군을 조속히 국경에 도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괴뢰군에게 재편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음과 동시에 점차로 그 개입의 실현성이 농후하여 가는 중공군의 기선을 제하려는 것이었다.
적은 평양이 아군에게 점령되자 사령부를 제1차로 희천에 이동하고, 제2차 이동을 강계로 정하였다. 그들은 제1차 방어선을 안주-개천-덕천 선으로, 제2차 방어선을 희천 선으로, 제3차 방어선을 강계 선으로 택하고 재기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당시 적이 받은 손실은 막대하였으며 포로의 수는 나날이 격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