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4권(74)

(二) 아군의 작전계획
(1) 워커 장군의 38선 돌파 명령
단기 4283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과 더불어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총반격 작전으로 순식간에 전국은 일변하였고, 적은 도처에서 지리멸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인천 상륙작전 부대의 일부 남하 부대와 북상 부대는 9월 26일 천안에서 기쁜 악수를 교환하였으며, 동 29일에는 정부 환도에 따라 이 대통령은 국련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와 동반하여 중앙청에서 감격적인 수복식을 거행하였다. 그날의 역사적 문화 도시인 수도 서울의 모습은 참담(慘憺)한 전화로 인하여 전일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변하였던 것이며, 서울을 완전 수복한 서부전선의 국군과 국련군은 계속 패적을 추격하여 일로 38선으로 급진하고 있었다.
중동부의 국군부대도 각처에서 적을 격파, 분쇄하면서 쾌속도로 진출, 이미 9월 말에는 동부 38선에 도달하여 계속 북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국군과 국련군이 38선에 다다르게 되자 한민족은 물론 자유세계 간에는 한민족의 국토 통일에 관한 구호가 날로 점고(漸高)되어 가고 있었다.
더욱이 중부 및 동부 38선에서는 국군이 38선 돌파 기세를 보이게 되자 국제간에는 그 돌파 여부 문제를 둘러싸고 떠들고 있었으며, 이와 같이 국제간에 여론이 비등(沸騰)되고 있는 가운데서 당시 주한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9월 30일 한민족의 흥분(興奮)된 가운데 국군의 38선 월경을 명령하였다.
그 후 국군이 38선 돌파 작전이 감행된 지 4일째를 맞이하는 10월 4일에 이르러 국련 정치 위원회에서는 국군과 국련군이 38선 돌파를 묵인하는 8개국 공동안이 가결되었다.
(2) 아군의 진격 작전 계획
국군은 38선 상에서 적 기성 방어진지를 격파하고 도주하는 적을 급속히 추격하여 일거에 양양을 점령하는 동시에 아군의 전 주력을 원산에 지향시켜 인접 부대인 수도사단 정면에 지원 견제공격을 가하는 한편, 철원 방면으로부터 후퇴가 예측되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급거, 원산을 공략할 기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