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의 일상#792] 세 번째 만난 쿠칭, 비와 커피 향이 스며든 주말
안녕하세요, 카일입니다.
벌써 세 번째 쿠칭(Kuching)에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 올 땐 그저 보르네오 섬의 한 도시 정도로만 알았고, 두 번째 방문은 관광지 몇 군데를 둘러보는 데 그쳤는데, 이번엔 큰 기대 없이 소소하게 주말을 보내려고 다시 발걸음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김없이 또 비가 내리네요. 사실 말레이시아에 살다 보면 우기냐 건기냐 크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달력상 건기라 해도 언제든 스콜처럼 굵은 비가 내리고, 또 금세 갠 하늘을 마주하곤 하죠. 쿠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늘 비와 함께하는 도시처럼 느껴집니다.
쿠칭의 매력은 화려함과 소소함이 묘하게 공존한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강변을 따라 늘어선 산책로와 현대적인 쇼핑몰이 있는가 하면, 오래된 건물과 시장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지요. 이곳은 특히 중국계 이민자들과 깊은 연관이 있는 도시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식민 지배 시절, 사라왁(Sarawak)에는 광산과 농장 노동력을 위해 많은 중국인들이 이주해왔고,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쿠칭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도심에는 오래된 중국 사원, 붉은 등롱이 걸린 거리가 여전히 남아 있고, 중국식 요리와 상점들도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지요. 말레이, 이반, 중국계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은 이 도시만의 독특한 색채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이곳의 또 다른 매력은 커피 문화입니다. 사라왁 커피의 역사는 사실 오래되었는데, 19세기 중국계 이민자들이 보르네오에 정착하면서 커피를 재배하고 즐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해요. 사라왁에서는 보통 ‘리버(Kopi O)’라 불리는 진한 흑설탕 커피나, 연유를 넣은 달달한 스타일의 커피가 대중적입니다. 카페보다는 전통 ‘코피티암(Kopitiam)’이 생활 속 중심이 되었고, 지금도 아침마다 로컬 사람들은 커피 한 잔에 카야토스트를 곁들이며 하루를 시작하곤 하지요. 이런 습관은 중국계뿐 아니라 이반족, 말레이 사람들 사이에도 자연스럽게 퍼져서, 사라왁의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이어주는 ‘사회적 시간’ 역할을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관광지를 가지 않고, 그냥 골목에 자리한 카페에 앉아 향긋한 커피향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봤습니다. 창밖으로는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분주히 오가고, 대화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흘러나옵니다. 한국의 어느 도시 카페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풍경인데도, 이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묘한 여유가 느껴지네요. 아마도 이곳이 가진 시간의 겹, 즉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는 도시의 성격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세 번째 오는 쿠칭이지만 올 때마다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화려한 듯 소박하고,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걸어가는 듯한 이 도시. 그리고 그 속에서 묵직한 향을 남기는 사라왁 커피 한 잔. 그래서인지 큰 기대 없이 와도 결국은 작은 울림을 남기며 돌아가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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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어느 골목길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향에 젖어 창밖을 보는 일... 생각만으로도 낭만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