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시간'

in #krsuccess5 days ago

“음악, 찰나가 과거 및 미래와 이루는 일치.”

헤르만 헤세의 『음악 위에 쓰다』를 읽으며 가장 깊숙이 남은 문장이다. 그동안 수많은 연주를 하며 느꼈던 고양된 감정들은 짙은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흐릿하고 모호했다. 그 감정을 언어로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헤세의 이 짧은 글을 본 순간 두터운 안개가 단숨에 걷힌 것 같았다. 음악의 정수를 이렇게 간결한 문장에 담을 수 있다니. 헤세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유리알 유희』에서 두 연주자의 합주 장면을 묘사한 부분은 단순한 음악 애호가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섬세한 음악적 통찰과 디테일이 담겨 있다.

음악학자 빅토르 주커칸들은 ‘음악의 시간’을 이렇게 말했다.

“음악에서 본질적인 것은 순간순간의 연속이 아니라, 현재의 순간이 과거의 순간과 미래의 순간을 포함한다는 사실, 즉 연속이라기보다는 관류이다.”

*관류貫流 - 사상 따위가 어떤 현상이나 사실의 바탕에 깔려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율에서 개개음의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하여 방향지워져 있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는 현재와 함께 그리고 현재 속에 주어져 있고, 현재와 함께 그리고 그 속에서 경험된다. 선율을 듣는 것은 듣고 있는 것, 들은 것, 들으려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그것이 기억되기 때문에 미래의 일부가 아니며, 미래는 그것이 미리 알려지거나 미리 느껴지기 때문에 현재의 일부가 아니다.”

“모든 선율이 과거가 기억됨이 없이 존재할 수 있으며 미래가 미리 알려짐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가 아니라 시간 속에 보존되어 있으며, 우리의 의식이 시간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스스로를 예측한다. 음악의 가능성, 모든 시간적 형태의 가능성은 그렇게 구성된 시간, 스스로를 보존하며 스스로를 예측하는 시간을 전제로 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음악을 듣는 감상자도,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 연주자도, 음악이 단순히 찰나의 예술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한 덩어리로 느껴지는 ‘음악의 시간’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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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씨너스: 죄인들>(2025)에서 이 ‘음악의 시간’이 환상적으로 묘사된 장면이 무척 좋았다. 1930년대라는 시대 배경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일렉트릭 기타와 디제잉은 자칫하면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너무나도 멋진 연출이었다. 다른 부분도 좋았지만 특히 이 장면은 영화사(동시에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마음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며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