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 한 덩어리가 수인의 귓속 깊숙이 밀어 넣은 인이어 이어폰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그 목소리는 한산하고 조용했던 오후 3시 반의 지하철 객실 안을 난폭하게 헝클었다.
육칠십 대 정도로 보이는 노년의 여성이 신발 두 짝을 한 손에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뭐라 소리를 내지르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맨발이었다. 흰색의 민소매 후드티에 시뻘건 원형 뿔테 안경을 걸친 그녀의 옷차림은 그 나이 또래 같지 않게 특이하고 화려했다. 사람들은 짐짓 모른 체하며 가만히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거나 다음 역에 내리는 시늉을 하며 슬쩍 자리를 피했다.
조현병일까. 아마 그렇진 않을 거라고 수인은 생각했다. 얼마 전 상담받았던 정신과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들은 대체로 조용한 편입니다. 실제 통계에서도 보통 사람들보다 폭력 사건 비율이 훨씬 낮아요.
노파는 끈질겼다. 이어폰 음량을 키웠지만 울분에 찬 목소리가 음악 마디 사이사이에 끼어들면서 음악을 기괴하게 증폭시켰다. 옆 칸으로 옮겨야겠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수인은 가방을 챙기고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문 앞에서 한참을 소리치던 여성이 내렸다. 지하철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두 정거장이 지나고 칠십 대 정도의 남성이 탔다. 그는 수인의 옆의 옆자리에 앉았다. 노래 한 곡이 끝나자 ‘갑자기’ 쿵쿵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진동이 수인의 엉덩이에 전해졌다. 수인은 소리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 노인이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지하철 폴대를 주먹으로 치고 있었다. 내리치는 강도가 약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세게 치면 비쩍 마른 노인의 손이 부스러질 것 같았다.
이건 사고事故 같은 거다. 교통사고보다 흔한. 밖에 나가면 언제나 이런 인간들과 마주치게 된다. 수인은 외나무다리 위에 서 있다. 피할 수 없다.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모를까.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바깥세상에는 무력감이 공기처럼 퍼져 있다. 골수 깊숙이 무력감에 감염된 인간들은 공공장소에 나와 강한 감정을 표출하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한층 독하게 변이된 무력감을 퍼뜨려 타인을 전염시킨다.
수인 역시 무력감에 전염된다. 이 무력감 바이러스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통제하고 싶다. 수인도 자신을 드러내고, 퍼뜨리고 싶다. 남에게 이 바이러스를 옮겨야 한다는 충동에 빠진다. 자신이 당한 딱 그만큼만.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갑자기’ 퍼뜨려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교통사고처럼.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질을 하는 노인에게 다가간다.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