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4권(12)
10월 24일 서부전선의 국련군은 적의 제1 방어선인 안주~개천 선을 돌파하고 청천강을 도하였으며 29일에는 해안선을 진격하는 영 여단이 정주를 통과하여 30일 선천에 도달하였고, 미 제24사단의 일부는 28일 태천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아 국군 제2군단 부대는 10월 24일 덕천을 점령하고 온정 방면으로 진출하였고 제6사단은 그 동익을 전진하여 24일 희천을 점령한 다음 진격로를 북편으로 돌려 회목동(檜木洞)~초산(楚山) 선으로 진출하였다. 10월 26일 아 제6사단 제7연대는 초산에 돌입하고 그 탐색대(探索隊)는 동일 17:50 압록강안에 진출하였다.
또한 동부전선에서는 원산을 점령한 아 국군 제1군단이 여전히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제3사단은 원산에 일부 병력을 잔치시키고 주력은 수도사단과 함께 전진하여 문천, 고원, 연포를 거쳐 10월 17일 함흥을 점령하였다. 여기서 아 제3사단의 일부는 부전으로 좌향하고 수도사단과 다른 제3사단 부대들은 홍원, 북청, 단천을 거쳐 10월 28일에 성진을 점령하였다. 10월 31일 아 제3사단은 길주에서 좌로 꺾어 합수를 향하고 진격하였으며 수도사단은 해군의 지원사격 및 미 공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11월 5일에 명천을 통과하여 그 후 청진으로 돌입하였다.
동부전선에서의 이와 같은 진격 작전이 계속하고 있던 동안 인천 상륙작전을 실시하였던 미 제10군단(제1해병사, 제7보병사)이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하여 원산 위수지구를 담당 중인 아군 제3사단의 일부 병력과 교대하는 한편 주력은 함흥을 거쳐 장진호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고 11월 10일 고토리를 통과하였다. 또한 아 제7사단의 일부는 국경 혜산진으로 한기와 싸우면서 전진하여 갑산을 거쳐 11월 21일 국경선 혜산진에 도달하였고, 원산에 다시 미 제3사단이 증원 상륙하였다.
회고하건대 개전 이래 쓰라린 눈물의 후퇴 작전을 거듭하고 한반도 남방 일단에서 궁형진지에 퇴축(退縮)되어 수개월간 고전을 거듭한 국군 및 국련군이 이와 같이 전성적(電聲的) 반격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게 된 것은 물론 그간 병원, 병기의 증원된 바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여 적의 군사기지, 보급로를 분쇄하고 차단하였던 까닭이다. 현대전은 물량이다. 인력과 물력과 수송력을 종합한 종심 전력이 전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또한 별도로 조국을 등에 메고 민족의 생사를 양 어깨에 짊어진 아 국군 장병들의 피어린 감투와 국가 민족 수호의 숭고한 희생적 정신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와, @koreanwar17님! 흥미진진한 한국전쟁 당시의 전황 분석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맹렬한 진격, 서부 전선부터 동부 전선까지 숨 가쁘게 이어졌던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주신 점이 인상적입니다. 압록강 도달과 혜산진 점령, 그리고 해상 및 공중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부분은 당시 전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 글을 통해 당시 국군 장병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혹시 이 시기 전투에 얽힌 다른 이야기나 자료가 있으시면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하네요! 댓글로 함께 토론해봐요!
항상 댓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