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5사변 육군전사 4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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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중공군의 개입 징조
중공군의 한국 전란에 개입 가능성은 낙동강 전선에서 괴뢰군의 남진이 저지되었을 때부터 공산측은 이에 분망(奔忙)하여 왔던 것이다.
그 후 국련군의 북진에 따라 그 가능성은 더욱 농후해졌고, 소위 조중상호방위협정이 체결되어 있었을뿐더러 공산측은 전략기반으로서 북한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기도에서 중공군의 개입이 단기 4283년 8월 26일 북경에서 개최된 중소회담의 결과로 중공의용군의 파견이 결정되었고, 동년 9월 2일에는 괴뢰와 중공의 합동참모부가 장춘에 설치되는 한편, 중공군 임표 휘하의 5개 군단 약 15만 명의 병력과 장비가 만주에 집결, 대기 중이라는 국부계(國府系) 통신에서도 보도된바 있었으며, 미 마샬 국무장관은 동년 9월 20일에 중공군의 일부가 북한에 입국설을 확인한 바 있었으나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당초에 중공의 개입설을 전적으로 부인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맥아더 사령부 정보국이 무능한 것은 아니었고, 사실 당 정보국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년 10월 25일 아 제1사단 제15연대는 운산 지구에서 중공군 1명을 생포한 바 있어 이의 진술에 의하면 동년 10월 19일 중공군 2만 명이 북한에 침입한 것을 알았으며, 또한 10월 26일 초산에서 국경선에 도달한 아 제6사단 제7연대도 처음으로 5,000명의 중공군에 포위당하였고, 온정 부근의 아 제6사단도 포위되었으며 운산 지구의 아 제1사단 소속인 1개 연대도 7,000명의 적에게 포위당하고 또한 장진호, 부전호 지구에서도 아 제3사단은 강력한 적의 저항을 받았는데 이 모든 적은 괴뢰군이 아닌 중공군이었다.
이와 같이 침입한 중공군은 4개 군 12만 명이었고 기습을 받은 아 제6사단은 병력과 기재에 손실을 입고 철수하여 동년 10월 29일에는 희천이 포기되고 동일에 동북 전선의 미 제10군단에서도 3명의 중공군을 생포한 바 있고 아 제1군단도 중공군 16명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동시 12월 1일에는 희천에서 아 제2군단의 정면으로 남하하는 중공군은 구장을 점령하고 덕천에 침입하였다. 그런데 중공은 동년 11월 7일에 이르러서야 중공의용군 2,000명이 한국 전선에 참전하였다고 처음으로 방송하였다.
동년 11월 5일 적은 정주, 박천, 영변에 침입함으로 아군은 정주-박천-영변-덕천 선으로 철수하여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적은 개천 지구에 병력을 집결하여 아 전선의 우익을 공격해 옴으로 미 제2사단은 이에 급파되었다. 이리하여 적의 견제 작전을 목적으로 서진을 명받은 장진호 지구의 국련군은 완강한 적에게 저지되고, 또한 11월 27일에 중공군은 아 제2군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동월 28일에는 덕천 남방 20마일까지 침공함으로, 동월 29일에는 국련군은 일제히 청천강 남안으로 총 철퇴하였는데, 이때 아 제1, 6, 7, 8사단은 많은 손실을 입고 철수작전이 시작되었으며, 이리하여 국련군의 총공격은 새로운 적 중공군에게 저지당하고, 국련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동년 12월 4일 새로운 전쟁은 시작되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로써 단기 4283년 11월 27일부터 대공세로서 시작된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한국 전란의 국제성은 새로운 단계에 변전(變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