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 든 • 손

in #steemzzang17 days ago

여름은 연두를 지나
초록의 길로 접어들었다

토끼풀 차지가 된 잔디밭
등나무 평상이 보이는 버스 승차장 옆에
빨갛에 익은 공중전화 부스가 서있었다

오늘도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없다
어느 날
버스 승차장이 옮겨 졌다
당연히 함께 이사를 가는 줄 알았던
공중전화 부스를 태운 트럭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제는 어쩌다 드나드는 사람도 없다
대신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깊은 밤이면 귀 밝은 별이 찾아와
눈물을 닦아주고
머리에 별빛 몇 방울 얹어주고 떠났다

침몰하던 부끄러운 양팔에
깃털이 돋아나고 있었다

image.png

여름 주의보/ 김천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여름이 자라
산그늘에 숨어있던 초록들이 톡 톡 터질 때까지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계절이 자주 바뀌는 건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꽃이 필 때마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꽃처럼 붉게 터졌다

봉천동 낮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버려진 아이처럼
나는 그런 아이들끼리 모여 땅따먹기 놀이를 했다

공터의 땅을 가장 많이 차지했지만
저녁이 되면 패망한 나라의 군주처럼 남겨지곤 했다

복개천 독일 빵집 골목으로 돌아오는 무수한 눈빛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황색 신호등 깜빡거리는 횡단보도 앞
거기 오래 서 있었다

매미들이 맹렬히 울기 시작했다

끝은 시작과 맞물린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끝일 것만 같은 생각이 고야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빨갛게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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