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안/시즌2] Chapter4. 지연된 세계와 어쩔 수 없는 마음

in #stimcity8 days ago (edited)



소년의 세계가 멈춰 버렸다. 소년을 둘러싼 세계는 지연의 마법을 부리는 듯, 소년을 풍경으로 고정시켜 놓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붙들고 있었다. 학교는 언제 수업을 시작하는지 가브리엘 교장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고, 단톡방은 수업 스케쥴을 묻는 대화창들의 읽지 않음 표시만 반짝이고 있었다.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기 위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수만 가지인데, 뭐 하나 제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서류를 넣으라 해서 서류를 넣으면 접수가 된 건지, 처리가 되는 중인지 알 수가 없고, 다시 문의를 하면 담당자가 곧 연락을 취할 테니 기다리라는 답변만 기계적으로 반복되었다. 거주할 집도 구하고, 새로 계좌도 만들고, 학생용 교통 패스도 만들어야 하는데, 집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은행 계좌는 주소지가 있어야 만들 수 있고, 집 임대를 위한 서류에는 은행 계좌가 필수 항목이었다. 학생용 교통패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학증명서가 필요한데, 학교에 문의를 하면 새로 인수한 학교의 학생들은 아직 등록이 되지 않았으니 역시 기다리라는 답변뿐이다.



소년은 기다림의 나날들, 지체되고 정체되는 나날들에 이미 오래 지쳐 있었다. 그러다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갑자기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숨돌릴 틈이 없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백이 생겨난 것이다. 씽크홀 같은 공백이. 인생은 마치 댐에 담아 놓았던 물을 쏟아내듯 휘몰아치다가도, 어느 순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한 밤의 정적 속으로 사람을 가두어 버린다. 정신 못 차리고 휘몰아칠 때는 한숨 좀 돌렸으면 싶다가도, 모든 것들이 멈춘 듯 지체될 때에는 꼼짝달싹할 수 없는 갑갑함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진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인생에는 질주와 공백이 순서를 지키며 번갈아 나타나는 데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질주해야 할 때는 망설여지고 공백이 생겨날 때는 조바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래야 할지 저래야 할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소년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달래려, 교차로 카페에 앉아, 신호에 따라 멈춰 섰다 다시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자동차와 사람들, 자전거와 오토바이들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인생에 신호등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좀 나을 듯한데, 인생에는 신호등이 없어 도대체 언제 파란불이 들어오고, 언제 빨간 불이 들어올지 알 수가 없다. 주시하지 않고 있으면 파란 불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기다리다가, 어느새 바뀌어 버린 빨간 불에 낭패감이 들게 된다. 지난날 소년 역시 불시에 변하는 인생의 신호등에 꽤나 갑갑한 시간을 보내온 것이다. 그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파란 신호가 지나간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 왔다.



'그래서 마법사님은 다른 어떤 마법보다도 타이밍의 마법이 중요하다고 했는가.'



소년은 자신을 타이밍의 마법사라 소개하며 인생의 타이밍에 대해 얘기하던 마법사의 말이 생각났다. 인생의 타이밍이 엇박자를 타면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상승세를 타면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은 지연되고 정체된 세계에 가두어진다고 마법사는 말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가두어진 세계는 사람의 마음을 썩어 들게 만든다고. 열정과 의지는 사그러들고, 한탄과 권태로 인생을 저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부패한 마음은 지연된 세계의 권태에 중독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네. 우주가 멈추지 않고 움직이며, 행성과 인간의 삶이 모두 계절과 시절을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야. 마치 강물 위에서 통나무 건너뛰기를 하듯, 지나가는 타이밍들에 올라타고 갈아탈 수 있어야 해. 물론 그렇다고 정체와 지체가 없는 것은 아니야. 다만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거지. 강물은 흐르고 통나무는 반드시 떠내려오니까.'



마법사는 소년에게 인생은 통나무 건너뛰기와 같다고 자주 말했다. 사람들은 인생을 징검다리로 여기지만, 인생의 국면들은 시냇가에 박혀 있는 징검다리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강물 위를 떠다니는 통나무나 남극의 유빙처럼,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서만 건널 기회를 만들어 주는 유동적인 흐름이라고 강조했다.



소년은 마법사의 말을 떠올리며, 신호등 따위 필요 없다는 듯 무시하고 건너다니는 이 도시의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이 도시의 행인들은 신호와 상관없이 잘도 건너다닌다. 건널목 가까이에만 다가서도, 위험하니 뒤로 물러서라고 경고를 해대는 도시에 살던 소년으로서는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낯선 광경이었다. 처음에는 무질서한 시민의식이라고 비난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자신도 따라 건너다보니 묘한 질서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보행자를 우선시하는 자동차들의 일단 멈춤. 그건 마치 헌법 같았다. 사람들은 의식하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자동차들은 언제라도 보행자가 나타나면 신호와 상관없이 먼저 건너가라고 브레이크를 밟아 주었다. 자꾸 건너다보니, 이 도시의 신호등은 사람도 자동차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릴 때 기준을 세워주는 깃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행의 흐름과 주행의 흐름이 자유롭게 교차하되, 혼돈에 빠져들면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으로써의 신호등.



인생의 흐름 역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데, 질주에 중독된 인간은 뭐든 빠른 것에 순서를 내주었다. 그 바람에 정작 인간적 삶을 위한 보행은 뒷전이고, 속력을 앞세운 질주가 먼저인 이상한 흐름이 사람들의 인생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자연스러운 보행의 흐름. 자연스러운 인생의 흐름. 그것은 무엇일까? 소년은 고민이 되었다. 보행을 방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방향이 명확하지 않은 갈지자 행보와 급후진, 그리고 나아가지도 멈춰 서지도 못한 채 움찔거리는 망설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그러기 시작하면 흐름 전체가 정체되고 지연된다는 걸. 모두가 연결된 세상에서 지체와 정체는 사람들의 인생을 한쪽으로 내몰리게 만들고 쌓인 것은 반드시 터져 나오기 마련이라는 걸. 나아가려는 에너지는 그대로 쌓여서 언젠가 감당할 수 없는 홍수를 쏟아내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는 타이밍이 없는 것이다.



소년은 자신의 타이밍이 이르렀는지, 통나무 건너뛰기를 잘 하고 있는지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소년은 에펠탑을 타고 떨어져 내릴 때까지 주저하거나 망설였던 적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타이밍이라고 직관했기 때문이다. 무지갯빛 착륙과 학교의 파산 소식, 파산한 학교가 새로 인수되고 오리엔테이션까지 마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신없이 흘러 온 시간들이 쏟아져 내리는 봇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세계가 멈춘 것이다. 세계가 순환을 따라 지연을 시작한 것이다.



소년은 직관을 놓칠까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기회를 놓치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다시, 지체된 세계에 갇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인생의 신호에 초집중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성실은 소년의 자질이기도 하다. 주어진 직관을 빼놓지 않고 완수하고 싶은 성실한 마음은 마법 학교를 선택하게 한 주요한 동기였다. 직관의 언어를 배워 인생의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러므로 뒤를 돌아보아도, 이제까지의 맥락을 다시 되짚어 보아도, 반응이 느렸거나 놓쳤거나, 잘못 선택했거나 성실하지 못했던 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왜 세계가 지체되는 걸까? 소년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마법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의 세계가 지체되고 있는 것 같다고.



'세계가 지체되고 있어요. 제가 놓친 게 있는 걸까요?'

'맥락을 되짚어 보았나?'

'네, 여러 번 되짚어 보았는데 딱히 실수한 부분은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왜 정체되는 거죠?'

'그렇다면 뭐가 문젠가. 기다리면 될 것을.'

'답답하니까 그러죠.'

'우주에게도 시간이 필요해. 순서를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니까.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니 누군가 망설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이렇게 지체되는 건 억울해요.'

'자네 때문에 억울했던 우주의 구성원들은 어쩌고. 빨간 불이 들어왔다는 건 곧 파란불이 들어온다는 신호 아닌가. 그러니 불안해할 것 없다네.'



마법사는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고 만다고 말했다.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 누군가의 지체는 모두의 지체가 되지만, 누군가의 질주 역시 모두의 질주가 되는 것이므로 결국은 나아가게 되어 있다고. 질주와 지체 사이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군중조차도. 다만 그 중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소년은 쏜살같았던 최근의 일들을 생각하며, 이것은 리듬이 깨진 것이 아니라 휴식이 주어진 거라고 생각을 전환시켰다. 또한 이 리듬에 익숙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신호 없이 잘도 흘러 다니는 이 도시의 사람들처럼. 그러면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도시에 왔는지, 왜 마법 학교에 입학했는지 다시 되새겼다. 어쩔 수 없는 것은 마음뿐이다. 어쩔 수 없는 세계에 갇힌 것이 아니라면, 지연된 세계는 결국 나아가고 말 세계인 것이다. 겨울이 가야 봄이 오듯.



소년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을 가볍게 비우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계산서를 달라고 했건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웨이터를 계속 기다리느니, 직접 카운터에 가서 계산해야 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투둑 하고 소년이 앉았던 자리에 새똥이 떨어졌다.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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