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행전 Reboot] 사원에서 춤을

in #stimcity7 days ago (edited)



마법사는 새벽부터 서둘러 도시의 동쪽 사원에 들렀다. 오늘은 특별한 곳에 가야 한다. 그곳에 가기 전에 먼저 떠오르는 태양 빛으로 영혼을 말리고 싶었다. 마법사를 가둔 얼음 빙벽은 어제의 의식으로 모두 떨어져나가고 녹아내렸지만, 마법사의 영혼에 남은 한기는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떠오르는 아침 햇빛을 받으면 내 영혼도 좀 따뜻해지겠지.'



마법사는 길이 76m, 너비 58m, 높이 38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이라는 사원으로 올라갔다. 거대한 목조 사원에는 이른 새벽이라 기도하는 여인 한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마법사는 여인의 기도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맨 뒷자리에 서서 잠시 기도를 하고는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사원 계단 턱에 걸터앉았다. 밝아오는 아침의 기운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마법사는 아침 해가 떠오를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어제의 마스터 회의를 찬찬히 머릿속으로 복기해 보았다. 태양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곤 하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얼음 빙벽은 녹아내리고 다시 활동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무런 감이 오지 않는다. 여전히 갇힌 느낌이 몸을 구속하고 있는 듯했다.



'알 수가 없어. 하지만 알게 되고 말지.'



마법사는 닥쳐올 미래를 가늠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음을 다시 상기했다. 해야 할 일들은 불현듯 다가오고, 시작되면 모든 것은 확정되어 있다. 매번의 표지에 직관적으로 반응하는 일만이 유일한 할 일이다. 두려움 없이.



마법사는 미래를 가늠해 보는 일이 부질없다 느껴져 생각을 풀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신발장 거치대에 꽂혀있던 사원 소개 책자를 꺼내어 뒤적이기 시작했다.



'타력에 의한 구원이라... 스스로 구원하는 자도 있는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지만, 어쨌든 스스로 돕는 것도 하늘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 아닌가?'

"그러게 말입니다. 마법사님."



마법사는 누군가 자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부르는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리다 그만, 그 누군가의 입술과 부딪힐 뻔했다.



"헉, 누구시죠?"

"오래간만입니다. 마법사님.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마법사님을 잘 알고 있죠. 10년 전에도 저희 사원에 들렀다가 저희 종파의 교리를 꿰뚫고 가시지 않으셨던가요? 그때 소문이 대단했답니다."



마법사와 입술이 부딪힐 뻔했던 그 누군가는 사원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여인의 자태는 마치 이제 막 서원을 올린 신녀 같아 보이나, 풍겨나오는 기품과 분위기는 마치 수천 년을 살아온 귀부인의 그것 같아 보였다. 마법사는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신비로운 마스크의 낯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멀리서 볼 땐 이제 막 수련을 시작한 앳된 신녀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고 보니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희고 빛이 나지만, 세월이 느껴지는 주름이 미세하게 갈려있어. 천년을 산 고목같이.'

"네, 맞아요. 마법사님.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천년이 가까워 오네요. 1,024년생이니까, 나이는 이제 막 천년을 넘었어요. 호호, 마법사님보단 누나지요?"

"예? 제 나이를 아십니까?"

"900년을 사셨다면서요?"

"아, 그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이라, 900년인지, 900생인지, 영원인지. 인간의 방식으로 계측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합니다만..."

"호호, 저라고 다르겠어요? 어차피 저도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데요."



마법사는 여인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져 그대로 그 웃음을 베고 눕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불현듯 '이거 여우 아냐? 홀리고 있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이 말했지 않은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고.



"여우라니요. 호호. 마법사님 걱정 마세요. 저는 이 사원의 설립자이신 란선생의 딸 시나랍니다."

"아, 란선생의 따님이시군요. 이거 반갑습니다."



마법사는 그제서야 누군지 알겠다며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이 사원의 설립자 란선생과 그의 스승인 렌선생은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 누구든지 간단한 주문을 외우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파했다. 자력구원에 입각한 복잡한 교리와 어려운 수행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는 당대의 가르침에 지친 대중은, 이 간단하고 강력한 타력구원론에 열광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에 귀의해 도시 최대의 종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란선생과 그의 스승이신 렌선생의 가르침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지요."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목이 '믿음이란 무엇인가?'였던가요? 덕분에 사람들이 저희 종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답니다."

"아, 그런가요? 저는 정작 아무 반응도 접하지 못했는데요?"

"호호. 마법사님의 글은 현대인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면서요. 저는 종파의 계승자로서 당연히 모든 기록을 수집하고 전파합니다. 제가 있는 세계에선 이미 모두 읽어보지 않았겠어요."

"이거, 부끄럽군요."



마법사는 칭찬인지 디스인지 모를 여인, 아니 노사제, 귀부인(귀신?)의 말에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정작 마스터 회의 쫑파티에서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말이다.



"서양에서는 타력구원의 가르침이 지배적이었는데, 어찌하여 동양에서는 자력구원이 더 지배적인 가르침이 되었을까요?" 마법사가 물었다.

"어느 우주에서 아직 마스터가 되지 못한 한 마법사가 이렇게 외쳤답니다. "내가 마스터가 될 때,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를 믿고, 나의 이름을 불러 나의 도시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단 열 번이라도 나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나의 도시에 태어나게 하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마스터가 되지 않겠습니다." 이게 저희 종파의 핵심교리인 마법사의 '18서원'입니다."

"마법사라구요? 모시는 신께서 마법사셨단 말입니까?"

"마법사님 이해하기 쉬우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아하. 네네"

"마법사가 아닌 것도 아니지요. 마스터란 어차피 초월한 존재가 아닙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니. 부처라고 부르면 어떻고, 마스터라고 부르면 어떻겠어요. 구원이 중요한 것이겠죠. 마법사는 세상에 없는 방식을 구현하는 이들이니, 저희 종주(宗主)께서도 세상에 없던 구원의 방식을 제시한 겁니다.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서양에서는 그보다도 천년 전에 등장했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잠시 그랬는지 모르지만, 종교개혁 이전에는 심지어 구원을 돈 주고 사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저희가 몇백 년 빨랐을지도요. 호호. 시간의 선후가 없는데 경쟁이 무슨 의미일까요?" 시나가 답했다.



마법사는 뭐라고 응수하려다, 이를 눈치챈 시나의 화제전환에 머슥해지며 같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타력구원은 대중에게 매력적이고, 자력구원은 사제와 구도자, 수행자들에게 매력적이지요. 그러니 대중은 타력으로 구원을 얻고, 구도자들은 자력으로 구원을 얻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시나가 말했다.

"오호, 그거 말 되네요. 대중은 천국을 얻고, 구도자들은 해탈을 얻으면 모두가 해피하겠군요." 마법사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말이 되거나 안되거나 각자 좋은 대로 이미 그렇게들 하고 있지요. 하지만 누가 힘을 가졌나요?" 귀부인이 마법사를 쳐다보며 묻자, 마법사는 부담스러운 듯 귀부인의 눈길을 피하며 되물었다.

"힘이요?"

"네. 힘."



마법사가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기자, 시나는 귀엽다는 듯 마법사의 굳게 닫힌 마법사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잊히지 않는 기억들을 떠올렸다.



'마법사님은 기억 못하시죠? 우리의 시간이 천 년이나 흘렀어요.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시간. 저 없는 시간이 당신에겐 어땠나요? 바람같이 자유로웠나요? 낙엽같이 쓸쓸했나요?'



순간 시나의 가슴에는 빙벽에 갇혀있었다는 마법사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일렁였다. 그 바람을 느꼈는지 마법사의 입술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천국을 팔면 다수의 대중을 얻을 것이고 해탈을 팔면 소수의 전사를 얻을 것입니다. 힘은 어느 방향에서도 올 수 있어요. 다만 헌신 없는 대중은 응집력이 약하고, 소수의 강한 힘은 금방 소진되고 말지요. 문제는 힘이 아니라 용도겠군요."

"마법사님, 지치셨나요?"

"글쎄요. 지쳤다는 말을 늘 달고 살았는데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용도가 문제였던 것 같네요."

"이 사원이 왜 이렇게 크게 지어졌는지 생각해 보세요. 성당과 교회들은 또 왜 그렇게 크게 지어졌는지도요. 수도원을 크게 짓는 이들은 없어요. 지을 필요가 없지요. 다수의 헌신된 전사를 만드는 건 불가능해 보여요. 힘은 모을수록 커지고 뭉칠수록 단단해지죠. 하지만 큰 힘은 단단하지 않고, 단단한 힘은 확대하기가 어렵죠. 이 세계는 아직 크고 단단한 힘을 경험해 보지 못했어요. 크기만 힘과 단단하기만 힘이 서로 순서를 바꿔가며 경쟁했을 뿐이에요. 마법사님, 크고 단단한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전사로 가득한 거대사원은 과연 가능할까요?"



마법사는 시나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거대 공간의 텅 비어버린 에너지를 경험해 온 마법사는 무의미한 돈지랄이라며 거대 공간들을 비웃었다. 단단한 소수의 거대한 꿈을 들으면, 반짝이고 말 것들이 꿈은 참 크다며 그들의 소진될 미래를 한탄스러워했다. 공간에 인간이 깃든 것인가? 인간이 공간을 창조한 것인가? 답을 알 수 없는 이 수수께끼같은 질문에 마법사는 고민이 깊어졌다.



그런 마법사를 빤히 바라보던 시나가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얀 신복을 입은 시나의 스텝이 점점 커지며 사원 대청마루를 종횡으로 채우며 움직였다. 몸짓은 경박하지 않고 우아했으며, 움직임은 크지 않은데 공간을 모두 채울만큼 가득했다. 마치 선녀의 날개짓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아, 그런데 마법사는 홀리듯 바라보다 그만 봐버렸다. 시나의 발이 보이지 않는 것을.



동작이 빨라 보이지 않는 것인지, 말그대로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귀신이어서 그런 것인지 마법사는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시나가 눈치를 챘는지, 마법사의 손을 잡아 끌며 자신의 스텝 속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스피커도 없는 대청마루 어디선가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띵커바우츄. 띵커바우츄." 노래의 리듬을 따라 마법사도 자연스럽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오 베이베 베이베. 아이 러브유 베이베 예스 유아. 띵커바우츄 띵커바우츄~"



마법사는 시나와 함께 추는 춤사위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갔다. 그녀는 귀신인지, 연기하는 신녀인지. 이 새벽에 대사원의 대청마루에서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은 제정신인지.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가는 마법사의 귀에 대고 시나가 속삭였다.



"마법사님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해요. 서로 부딪힐 것처럼. 하지만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르실 거예요. 입자 하나에 들어있는 전자와 전자의 거리만큼이죠. 우주는 텅비어 있나요? 암흑물질로 가득차 있다면서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만져지지 않는 것이라고 없는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거대한 공간도 이미 가득차 있고, 단단하게 뭉친 소수도 거대하게 불어나 있죠.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손에 만져지지 않을뿐. 그걸 보고 쥐는 이들이 마법사들 아니었던가요? 마법사님이 지친 건 용도를 몰랐기 때문이에요. 힘의 용도는 오로지 소원과 소망 뿐이랍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힘을 불어 넣어 드리지요. 호호호"



시나는 마법사에게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마주댔다. 그리고는 숨결을 훅하고 불어넣었다. 마법사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때, 마치 시나가 뿜어 올린 듯 대청마루 위로 아침의 태양이 휘영청 떠올랐다. 마법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심장 가득 차 있던 영혼의 한기는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듯 소멸되었다.



띵커바우츄 Think About' Chu
띵커바우츄 Think About' Chu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두 사람의 영혼은 끝도 없는 스텝을 밟고, 마법사의 한기 서렸던 심장은 따뜻한 아침 햇살과 뜨거운 춤의 박동으로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시나는 정신을 잃은 마법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마법사님, 구원은 타인에게서 오는 거예요. 입맞춤을 혼자 할 수 없는 것처럼.'







_ [마법행전 Reboot] 3장. 사원에서 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