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어머니가 없는 나라

'아마테라스(天照大神)'는 어머니가 없다. 그녀는 (어떤 설에 의하면 남자라고도 한다) 아버지의 눈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들 역시. 일본의 국조인 아마테라스는 신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후손인 천황 역시 어머니가 없고, 일본인들 역시 어머니 없이 태어난 아이들인 것이다.
어머니가 없는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기는 하나, 아버지가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테라스의 아버지 '이자나기(伊邪那岐)'는 아내 '이자나미(伊邪那美)'가 불의 신 '카구츠치(火之迦具土)'를 낳다가 화상을 입고 죽자 저승으로 아내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흉측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도망을 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하지 않고 도망친 것이다.
신화와 전설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지만, 한 집단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중요한 창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그렇게 된 데에는 한 집단의 축적된 생각, 정서, 감정들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열도의 신화가 '어머니 없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어머니 없이 존재하는 무엇은 없으니까.
반면에 한반도의 건국 신화는 강력한 어머니로부터 시작한다. 마늘과 쑥을 먹고 백일 간의 수행을 견딘 곰이 인간이 되어, 신과 결혼하여 낳은 아이가 세운 나라. 신의 아들이 세운 나라의 신화에서 어머니는 나라와 민족의 시원이자 근원이다. 그리고 사람은 없다. 사람이 된 곰과 신의 아들이 낳은 자식. 초월적 존재들의 결과물인 것이다. 반도인의 기원이.
그래서인가, 한반도의 모성신화는 강력하기 짝이 없다. 희생과 헌신의 어머니, 모든 인내와 감내의 화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 신화는 강력한 정서적 근간이자, 한반도산 콘텐츠의 단골 메뉴이다. 이 민족이 어머니 곰의 인내로 탄생했으니까.
모성신화야 어느 문화권에서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어머니 없는 존재가 없으니까), 특이하게도 일본의 건국 신화에서는 그 부분이 부재하다. 집단 무의식의 차원에서 그것이 어떻게 일본인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가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머니 부재(不在)의 신화'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국교인 '신도(神道)'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나름의 철학으로 승화시키는데,
"오오쿠니누시가 주재하는 죽은 어머니의 세계가 인간존재의 지평이라는 노리나가의 발상은 히라타 아츠타네가 조직적으로 세운 복고신도의 교설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이자나미에 대한 사모를 신대신화의 하나의 근원적 모티브로 보는 관점은 오리구치 시노부의 타계론 및 사토 마사히데의 원향 세계론 속으로 이어지게 된다. 멋대로 상상하자면 이 세계의 원초적 상이 어머니를 모르는 아이(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에게 떠맡겨져 있다고 하는 신화적 형상은 일본인의 불교 수용 및 불교 이해와도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서로 조응하고 있는 듯하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석가도 생후 7일째 어머니를 잃었고 그 후 석존의 행적에는 어딘가 죽은 어머니를 향한 끝없는 사모의 정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쪽이건 노리나가의 탐구를 계기로 하여 어머니의 상실을 중심축으로 한 사상이 신도학파의 하나로 부상하게 된다. 경치의 안쪽에 있는 어두운 그 무언가는 기피해야만 하는 더러움임과 동시에 죽어버린 그리운 어머니의 환영이었던 것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일본 에도 시대의 국학자(國學者)로, 일본 국학의 4대 인물로 꼽힌다. 노리나가는 아마테라스 신화를 일본 고유의 정신과 천황 중심의 세계관으로 체계화하여 일본 국학의 기틀을 닦았다. 노리나가는 유교와 불교 등 외래 사상을 배척하고 《고사기古事記》를 통해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한 '천황 신앙'과 '일본 중심주의'를 체계화했단다. 그의 이론은 후대에 '정한론(征韓論, 조선 정벌론)'과 군국주의자들의 이념으로 왜곡, 오용, 강화되었다고 한다.
노리나가는 그의 독창적인 해석인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일본 고전 문학에서 발견한 감정적이고 미학적인 개념으로, 사물과 자연의 덧없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강조)를 일본 정신(야마토고코로, 大和心)의 핵심으로 보았으며, 유학의 이성적 사고를 비판했는데, 그의 해석에 의하면 죽은 어머니에 대한 사모는 그리운 "슬픔"이다. 신도는 이 "슬픔"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교리화했다.
"먼저 노리나가는 근원적 실재를 무한한 생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원적 실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자나기, 이자나미 두 신의 화합 이야기라고 보았다. 두 신의 만남은 절대적 만남이며, 두 신의 하나됨은 그 자체가 바로 진정한 실재였던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는 이 두신이 낳은 것이다. 이처럼 노리나가는 근원적 부부, 남녀이자 천지의 부모로서 이자나기, 이자나미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러한 근원적인 만남, 하나됨이 드러나는 것은 별리, 분리와의 표리관계 속에서이다. 하나됨이라는 형태는 분리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완전한 하나됨은 만나서 헤어짐이라는 시간 속에서 두 번 다시 없는 기적적, 일회적 사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두 신의 이야기는 이자나미의 '상실'로서 '완결'되는 것이다.
여신을 상실함으로써 이 국토는 미완성의 것으로 완성된다. 남신의 '나와 너가 만든 국토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古事記)라는 울부짖음은 이 국토에 사는 존재자의 본질적 모습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곳이다. 그리고 또한 이 점이 《고사기古事記》를 신화의 최고봉에 두는 복고신도가 그 이전의 신도설과 발상을 크게 달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일본서기日本書紀》 본문에는 애초부터 황천국 설화가 나타나 있지 않고 또한 이 두 신의 국토생성 사업을 '신으로서의 일을 마쳤다.' 혹은 '덕이 또한 크다'고 말함으로써 이 세계를 '완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부재를 다른 방식으로 우회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상실로 판정하고, 그것을 "슬픔"이란 감정으로 직면하여 승화시키려는 시도는 흥미롭다. 부재는 결핍이고, 결핍은 회피와 미화의 대상이 되기 마련인데 이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심지어 민족정신으로 내세우기까지 하다니. 상당히 놀랍고 흥미로운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어머니 부재의 "슬픔"은 존재 근원의 결핍에 대한 슬픔이므로, 그 기원을 갓난아이의 울음으로부터 찾아 내려간 시도 역시,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이 왜 울었는가 즉 울음의 이유를 기억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울음 자체마저 잊어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갓난아이의 울음과 성인의 울음이 울음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한다면, 현재 우리들이 우는 이유 및 그 의미를 반성해 봄으로써 갓난아기가 만났던 세계의 시원을 가체험해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일본 문학사상 명망 높은 노리나가의 《정취론情趣論》은 바로 이러한 방향성을 띠고 등장한 사상론이었다. 또한 우리들의 삶이 존립 가능한 한계점을 '어린아이처럼 울고 슬퍼하는' 이자나기의 모습에서 읽어내는 노리나가의 정취론은 국학의 와카(和歌) 연구의 흐름을 복고신도 교설로 잇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란 사물에 접했을 때 '마음이 동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이 사물에 접하면 마음은 그것에 반응하여 기쁨, 슬픔 등등 여러 방향으로 동요한다. 아날로그 메터의 바늘의 움직임과 같이, 마음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사물에 대한 감지가 바로 모노노아와레를 아는 것이다. 마음의 동요가 두드러지게 크면 이것은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온다. 이러한 탄식의 말도 모노노아와레인 것이다. 아와레란 원래 "아아"라는 탄식 소리였다. 이 소리는 마음의 움직인 그 자체의 표현이자 움직임의 크기 즉 아와레의 깊이를 표시했다. 아와레가 깊으면 그것은 저절로 소리가 되어 나온다."
"가장 깊은 아와레가 슬픔이라는 것은, 슬픔의 장 속에서 사물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 생존의 가장 근원적 모습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즉 우리들과 사물의 가장 근원적 만남의 형태는 '슬픔'이며, '슬픔'은 이러한 까닭에 우리들에게 가장 확실한 진리의 감지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가장 깊은 인식이 슬픔이라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관계되어 있기는 하나 이것은 결코 모든 것이 허무함을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다만 시간적 인식은 상실에 대한 지각을 통해 얻어진다는 하나의 상식적 입장을 드러낸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얻어진 대상 전체가 바로 노리나가가 말하는 이야기라는 장르였던 것이다.
노리나가에 따르면 모노노아와레란 우리가 유한자로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의 감지를 뜻했다. 아와레의 극한인 울며 슬퍼함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한계를 말하자면 우리들의 존재지평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울음은 우리들 자신의 한계의 표현이며 이처럼 갖가지 상실로서 나타나는 우리들의 존재지평의 극한이 바로 죽음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신의 영역은 죽은 어머니인 이자나미가 있는 황천국이 된다. 어머니를 알지 못하는 자식인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는 한쪽은 부모의 결합의 유품인 이 세계를 보존하고, 또 다른 한쪽은 '어머니의 나라인 황천국에 가고 싶어', '울며 울다' 결국 어머니의 나라로 갔다고 전해진다.
세계의 반전과 교류 사이에 끼어, 기뻐하고 슬퍼하며 이별 속에 동요하는 모습이야말로 어머니를 근원적으로 상실한 미완성의 아이로서 있는 이 세상의 존재자의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
사람은 왜 우는가라는 이 장의 첫 물음에 대한 노리나가의 답은 거의 명확해졌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어머니와 찢겨진 어린아이임을 본지로 하고 있다는 것이 그 답이다."
어머니를 상실한 어린아이의 울음과 깊은 슬픔. 이 독특한 지점으로부터 일본의 국교인 '신도(神道)'가 출발한다. 신화란 것이 본래 그 땅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총합이라고 한다면, 인류 이동의 역사를 따져볼 때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이들의 신화로 연결지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한반도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마고'가 아마테라스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으니, 일본의 한반도 도래인들의 신화가 각색되어 전해 내려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집단 무의식의 정서를 지각변동으로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열도의 그것으로 생각해 보면, 어머니 대륙으로부터 버려진 섬, 또는 어머니의 땅으로부터 이주한 도래인들의 정서가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동하는 대륙 내에서의 이동과 달리, 섬으로의 이동은 유배나 환란과 천재지변으로 인한 피난 등 불가피한 측면이 더 직접적인 유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야 하니까.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열도의 신화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국교의 교리화에 있어 '어머니의 부재'를 인정하고 이를 '슬픔'이라는 정서로 해석하여 승화시키려는 시도는 좀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결핍은 미화시키거나 회피함으로써 포장하기 마련인데. 그래서인지 일본 국학의 입장은 그 대단함을 과장하여 낯 뜨겁게 오버하기도 한다. 대륙의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철학이 열도에 없는 이유는 그런 것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성숙한 사회여서 그런 거라는,
"마부치는 고대 일본에는 인의예지와 같은 구구한 이치는 없었으나 그래도 세상은 '천지의 마음 가는 대로' 느긋하게 큰 과실 없이 통치되었다고 보았다. 중국의 가르침은 원래 인간의 머리로 만든 것으로 논리정연하여 그 누구나가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천지의 움직임 전체는 인간의 사고를 훨씬 뛰어넘은 광대한 것으로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인의예지와 같이 추앙되는 덕목 등은 있어도 무의미하며, 일본은 오히려 이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긴 세월 동안 평안하였다. 즉 '세상은 구구한 이치만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마부치의 근본 입장이었던 것이다."
교리라는 것이 통치의 이념이므로 유리한 대로 구부러지기 마련인데, 어머니의 부재를 슬픔으로 인식한 것까지는 좋으나 그것을 무리하게 확장하여 아마테라스의 동생 스사노오가 처음 내려온 땅이 신라라고 한반도의 기원을 주장하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여 강제 병합된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동화시키려 했던 과거는, 고작 100여 년 전의 인류는 허구의 신화가 논리적 근거로 사용되는 '전설의 고향'이었던가 하는 헛웃음을 짓게 한다. 이 시대에 누가 '우리는 같은 곰의 자손이니 너는 나를 해쳐선 안돼'라고 산속 곰에게 말하면 '그런가?'하고 높이 쳐든 발을 내릴 거라 생각하겠는가.
그럼에도 신화, 이야기의 힘은 강력해서 국가 간의 논쟁에도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고, 나치의 '아리안족 신화'처럼 전쟁과 침략의 프로파간다적 교설이 되기도 한다. 여전히 진행 중인 중동의 '시오니즘'과 '성전(聖戰)'이나, 마가(MAGA)의 성경적 근거를 대는 교설들은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손바닥에 王자를 쓰고 나와 대통령이 된 이도 있으니). 그것은 결국, 인간은 이야기의 동물이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노리나가의 이야기론에 조금 더 부연해 본다면 다음처럼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사물의 모습을 통해서만 진리에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의 경과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진리를 이처럼 자각적으로 파악하려 한 영위가 바로 이야기이다. 시간 속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없는 존재인 우리들이, 시간의 흐름(변화)으로 경험되는 사물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 시간을 의식적으로 더듬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신체를 지닌 우리들은 시간을 역행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들의 의식만은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 코바야시 히데오가 '잘 상기하는 것'이라 부른 의식적 상기의 형태가 바로 이야기(로서의 역사)인 것이다. 이야기는 진리의 시간적 표현 혹은 시간 속에서 만나진 진리의 형태인 것이다.
노리나가는 이처럼 진리는 그 만남의 성질상 인의예지와 같은 조리, 개념의 체계로서는 잡히지 않으며, 이것은 단지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만 파악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다른 표현을 하자면 우리들은 이야기를 읽음(해석)으로써 이야기 전체를 통해 나타나 있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진리는 이야기 전체로서 우리들 앞에 있다."
진리는 이야기를 통해 나타난다. 일본 국교의 선도자들은 이야기의 힘을 알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움직여 진리를 확립해 왔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천황은 신이 빚은 창조물이 아니라 물질이 신에게서 응고된 신 그 자체이다.
"인간이 흙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은 세계 도처에서 쉬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다. 스이카신도의 '토금(土金)' 역시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렇다면 토금사상의 특색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무엇보다도 금에 의한 응고로 집약할 수 있다. 사람은 신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성서의 피조물과 같은 사고방식)이 아니라 신이 중심에 있음으로써 응고한다는 것, 이것이 토금사상의 핵심이다. 토금의 중심은 근원적으로 쿠니노토코다치이며 군주인 천황이다. 따라서 사람은 군주에 의해 응고된 존재로서 있게 된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모습인 경건함이 오로지 상위자를 의식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도 실은 이 토금의 구조에 의한 것이다."
어머니 없는 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천황은 신 그 자체이므로, 신도의 신인 천황에게 참배를 올리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이 일본 국교가 내세우는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그 이야기의 힘이 20세기 동아시아를 흔들어 놓았다. 물론 신도들은 황국의 신민들뿐이었으나.
그런데 어머니의 부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슬픔'을 교리화한 이 매우 성숙해 보이는 신화적 해석이 회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의 부채의식이다. 신화에서는 어머니 이자나미가 저승에서 오염된 존재가 되어버려 아버지가 접근할 수 없었고, 잠시 그녀를 마주한 아버지마저 일부 오염되어 정화의식을 거쳐야 했다고 (변명)하지만, 어머니를 포기한 아버지에게서는 마늘과 쑥만 먹으며 동굴에서 백일을 견뎌낸 어머니의 초월적 그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야기에서는 이자나미가 분노하여 그를 쫓았으나, 이자나기는 쫓아오지 못하게 요미노쿠니(저승)의 입구를 봉인해 버렸다고 한다. 심지어 그 아버지는 분노하여 어머니를 죽게 한 불의 신 '카구츠치(火之迦具土)'를 칼로 오등분 해 죽여버렸다. 물론 오등분 낸 그는 자신의 자식이다. 그 후 정화의식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이 아마테라스와 형제들이다. 그러니 아마테라스는 어머니의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어머니 없이 태어난 아버지의 자식들일 뿐. 이야기에서 어머니 이자나기는 도망치는 아버지를 향해 분노하여 매일 천명을 죽여버리겠다고 저주를 내린다.
불의 신을 낳다 죽은 어머니. 매일 천명을 죽여버리겠다고 저주를 내린 어머니. 칼 융의 분석 심리학적 해석을 적용하면,
그림자 또는 암흑의 여성
죽은 후 요미노쿠니의 '썩은 시체', '추적하는 존재', '죽음의 선언'. 이는 '그림자의 여성 원형 (shadow feminine)'을 상징합니다. 융은 이처럼 두 얼굴(창조와 파괴)을 지닌 여성을 "무서우면서도 신성한 어머니", 즉 '테라 마테르(Terra Mater)'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니마(Anima)의 어두운 모습
남성(이자나기) 입장에서 보면, 이자나미는 초기에는 아름답고 창조적인 아니마였으나, 무의식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섬뜩한 진실(죽음, 분해, 두려움)'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는 무의식의 깊은 층으로 들어갔다가 '정화와 통합 없이 급히 빠져나오려는 자아의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이자나미는 “창조와 파괴,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을 모두 지닌 원형적 여성 신입니다. 그녀는 무섭고도 아름다운, 인간 내면의 양극을 연결해 주는 통합의 여신이기도 하며, 그 그림자를 직면하는 자만이 진정한 자기(Self)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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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도망쳐 나온 아버지 이자나기는, 스스로 정화는 했다지만 통합해 내지 못한 아니마를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열도인들의 아버지는 이 숙제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유전하였는가? 아마도 가장 슬프고 억울한 이는 불의 신 '카구츠치(火之迦具土)'일 것이다. 그의 존재는 어머니를 죽게 했고, 자신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손에 동강이 나야 했다. 그래서일까? 억울한 불의 신의 원혼이 열도에 원자탄을 박아 넣기도 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폭파하기도 한 걸까? 세계 어떤 나라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불의 저주를, 세계 어떤 신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어머니 없음'의 나라가 연달아 경험하였다. 그 신화를 왜곡하여 '내선일체' 따위를 강요하다가.
게다가 불의 신은 여신이 퇴거하는 이유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남신의 분노를 사 칼 베임을 당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게다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신 역시 죽임을 당한 불의 신은 황천국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다. 만일 황천국의 불 때문에 더럽혀진 몸으로 이 국토에 돌아오면 불의 신의 분노로 '이 국토에 흉사가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국토에 깊은 애정을 지닌 여신이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국토에 돌아올 리는 없다는 것, 이것이 아츠타네의 황천국 설화 해석이었다.
노리나가이건 아츠타네이건 그들의 신화 해석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에는 반드시 불의 더러움의 문제가 놓여 있다. 이자나기, 이자나미가 낳은 이 세계의 존재자에게 불의 더러움은 근원적인 정신적 터부(금기)와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신도의 근본정신이 불의 더러움을 꺼리는 것이라는 복고신도의 주장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불을 꺼리는 풍습이 없는 외국의 물건은 신에게 바치지 않는다고 하는 아츠타네의 주장은 이후 복고신도의 황국지상주의의 하나의 근거로 등장하게 된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불의 더러움이 재앙의 근본이라는 복고신도의 입장에 선다면 여신이 남긴 물과 흙으로 진압되지 않는 불은 이론상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궁극적인 불의 난폭함이 될 것이다. 화재에 의한 불의 재앙은 이러한 대표적 예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화재라면 물과 흙으로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지만 오늘날에는 이것들로 꺼지지 않는 불은 얼마든지 있다. 만일 아츠타네가 원자력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것이야말로 황천의 왕(王)의 더러운 불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까.
엄격히 말하자면 어머니 이자나미는 아마테라스와 그의 형제들의 친모(親母)가 아니다. 그러니 어머니 부재의 슬픔을 강조하려면 열도의 시원과 천황의 조상을 아마테라스와 그의 형제들이 아니라, 불의 신 카구츠치와 그의 형제들에게서 찾아야 했다. 이 어긋남은 열도의 혼돈과 고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도래인들과 원주민들의 혼돈, 대륙으로부터 분리되었으나 재결합을 모색할 수 없는 고립. 신화를 왜곡한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대륙의 형제들에게 '대동아공영권'을 강요해 보았으나, 현실은 오히려 대륙의 형제들에게 민족의 원수가 되고 말았으니. 형제사(兄弟事)는 태초부터 어렵다.
21세기의 현실 역시 그들의 신화를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억압된 집단무의식이 현실로 발현될 때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그림자를 직면하게 된다. 이 불에 대한 원초적 공포, 어머니 없음의 '부재의식'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의 '부채의식'이 일본인들에게 어떤 그림자로 발현하게 될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이념을 넘어 내재화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웃이므로.
하지만 희망적 단초는 본서의 시작에서 밝힌 일본인들의 신에 대한 원초적 의식에 남아 있다.
"우리의 바로 눈앞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산과 강. 그리고 거기서 행해지는 노동, 양육, 식사, 휴식 등등의 일상적인 삶. 이처럼 친숙한 풍경과 삶을 우리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으로서 믿고 산다. 즉 우리는 평소 이와 같은 친숙한 일상을 새삼스레 이것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다. 풍경은 완전히 뒤집혀 버리고 우리의 삶은 동요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뒤집어진 풍경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우리가 재차 우리의 '기억과 상식'을 회복하기까지의 시간을 바로 신의 경험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신의 경험은 우리가 통상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던 삶 및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던 일상의 풍경을 이제는 잃어버린 것으로서 그리고 또한 일각이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무의식중에 길을 잃어버린 미아가 바로 잃어버린 길을 묻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도란 근원적으로는 신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가 걸어온 길, 지금부터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을 묻고 물어 가는 것이다.
신은, 와서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으로, 또 이 시간을 메우는 행위의 연속으로서 경험된다. 이러한 행위가 바로 신을 접대하여 돌려보내는 과정인 제사의 원형인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가 의식적으로 반복되고 재차 되밟아짐으로써 제사는 점차 고정된 하나의 형태를 갖게 된다. 제사는 신의 경험이자 신과 함께 보낸 시간의 "형식"인 것이다. 직접 무엇무엇으로 파악 불가능한 신은 신과 함께 살아온 시간의 형태인 제사를 통해 무엇무엇으로 고정되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적으로 체험된 신의 경험, 즉 제사를 반성적으로 재차 직시하는 곳에 다양한 신도 교설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은 당시 일본인이 신을 대할 때의 태도 및 교제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이 대외관계의 문맥에서 타국이 일본과 교류할 시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인 예의 주장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일본은 신에 대한 제사를 근본으로 하는 나라이며, 그러한 한 일본과의 교제는 지혜, 무력이 아닌 오직 신에 대한 제사를 고려하는 방법만이 유효하다는 것, 이것이 위의 입장이다."
위의 입장을 통해 보면 일본인들에게 신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경험되고 있는 일상을 뒤집은 전복된 사건과 시간'이다. 그리고 손님에게 하듯 예를 다하면 전복된 경험의 사건과 시간이 지나고, 보편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다.
"물론 제사의 힘으로 지진, 분화가 멈추는 건 아니다. 제사는 원래 계속되는 분화, 지진의 흔적을 진정시키고 소실시키는 기술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이미 출현해 버린 신을 직접 조작하거나 소멸시키는 기술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들 곁에 와버린 신과 더불어 어떤 일정한 시간을 지내기 위한 기술이며, 가끔씩 '지옥회도', '악마의 흔적'에 비유되는 반전된 풍경이 다시 익숙한 우리의 일상적 풍경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술인 것이다. 믿고 기다린 결과 다시금 평온한 일상이 회복되었을 때, 이 이 일상이 가령 그 이전의 일상과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일상을 전보다 더 감사하고 풍요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재앙은 사라지고 우리들의 일상은 완전히 새롭게 회복되는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일 때 사람들은 이 평화를 회복한 것이 바로 기다린 시간 동안 정성 들인 제사의 힘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지진, 분화를 진정시키는 것과 진정을 기원하는 것은 결코 동일한 사태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한 번 일어나 버린 재해를 수습하고 우리에게 친숙했던 일상적 풍경이 회복되기를, 고난 속에서 희망을 지니며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은 예는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제자(천황)가 집행하는 제사는 이처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사람들의 기분을 대변하고 표현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과학기술이 진보하면 언젠가는 모든 천재지변이 통제되고 해를 입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을 기대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비록 그런 시대가 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 자체가 항상 죽음을 비롯한 다양한 재해에 노출되어 있다는 구조 자체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기술에 과도한 기대를 거는 것은 우리의 삶이 즐거움과 고통, 선과 악, 기쁨과 슬픔, 안심과 불안 등등으로 뒤얽혀 있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은 보다 바람직한 삶을 방치하는 길이 된다는 말이다. 기쁨과 두려움에 둔감하다는 것은 다름 아닌 윤리의식의 둔감을 뜻하기 때문이다. 일본열도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신과 함께 있음을 감지한 시간은 무엇보다도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보다 바람직한 삶을 구상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갑작스런 재해, 풍경의 반전 속에서 신을 경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세계의 모습 및 삶을 반성하게 하는 윤리적 사색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수백만의 신을 섬긴다는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신과 함께하는 시간과 다른 말이 아니라고 하면, 매 순간 우리는 수많은 신들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신적 경험에 예를 다하고, 그것이 지나가고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기복'에 물든 신앙으로 신을 열망하는 타종교 신자들의 그것과는 방향이 다른 듯 보인다. 자연재해가 많은 열도의 환경으로 말미암아 일본인들에게 신적 경험과 시간이란, 복에 복을 더하는 축복의 존재이기보다 일상을 뒤집는 불편함으로 인식되어 왔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체화, 내재화한 이들이, 그 재앙의 시간들과 잘 동거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신을 수용하게 되었으리라. 손님이 잘 지내다 원한 없이 떠나가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에 천명을 죽이겠다고 저주를 내린 어머니의 선포는, 그렇다면 나는 하루에 천오백명을 낳겠다는 아버지의 응수로 생과 사의 순환고리를 완성했다고, 신도는 해석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태어난 아마테라스와 그의 형제들은 생명의 아이들이겠구나. 그들이 열도인의 조상이 되었다. 자연재해로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고 죽는 땅에서, 열도인들의 무의식적 공포가 매번, 매순간 생명의 탄생으로 복원되고 대응되기를 마법사도 바란다. 그러나 (이제는 한반도가 앞질러 버리긴 했지만) 저출산의 원조국인 열도의 현재를 보면, '내선일체' 따위로 신화를 오용하며 강제 병합을 시도하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같은 신의 아이들인 이웃들을 환영하고, 기후 위기로 인해 더더욱 자주 강림할 신적 '시간'을 함께 감당할 수 있기를.
그 신께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灰) 대신 화관(花冠)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시기를 기원한다.
[위즈덤 레이스 + Book100] 021. 어머니가 없는 나라 일본_ 칸노 카쿠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