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31] 소심과 세심 사이

in #zzan2 day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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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근도 없고 비겁도 없으니 신약합니다.
주관을 내세우려 하지 마세요. '

친구 따라 강남 아니고 사주팔자집에서 들은 말이다.
그래요?
했지만 속으로 강하게 부정했다.
나를 아는 이들은 나의 '한 고집'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정말 큰 결정은
옆의 가족1이 다 하고 있었다.
서산에서 정착하고 사는 것도
(사실 난 대도시를 좋아한다)
농사를 짓는 것도
(내가 공부한 이유는 오직 하나
부모 따라 논밭에 가는 게 죽도록
싫어서 였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 밭에 가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자제하는 것도
(가족1은 나처럼 유목민이 아니고
씨족 집단 안에서 안심한다.)
모두 가족1의 주장이 작용하고 있다.

내 의지대로 하는 것은 일 하기 싫으면
도서관으로 피신하는 것 정도.

오늘도 나의 소심함이 쌓인 하루였다.

"둘째가 온다네."

둘째가 온다니 나가서 좋아하는 해산물 사와라,
찰떡 같이 알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 더위에 재래 시장에 나갔다.
예상대로 더위에는 장 보는 사람도 없다.
지난 번에 참소라를 팔던 아줌니는
식사를 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곳에도 널린 게 소라인데
이 아줌니를 고집하는 이유는
아줌니 남편이 어제나 오늘 새벽에
잡은 것을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또 정식 점포가 아닌 파라솔 밑에서
팔기에 산소호흡기가 없다.
오후 되면 상하고 그러면 낭패 아닌가.

다른 것부터 사고 꽤 돌다 왔는데도
여전히 소라들만 땡볕에 말라가고 있다.

"여기 아줌니 어디 갔어요?"

손끝으로 소라 뚜껑을 톡 건드려
살았나 확인하며 옆 파라솔 밑에서
고구마 순을 다듬는 할머니께 여쭈니
밥 먹으러 갔는데 여태 안 온다며
엉덩이를 털며 길 건너편 상가로 간다.
거기에 그녀의 고모가 있다는 거다.

이쯤 되면 됐어요, 했어야 했다.

건너편 해산물 상가 입구에
비닐로 가림막을 한 곳에 한 여인이
선풍기 밑에 달게 자고 있다가
굼뜨게 눈을 뜬다.

자다 깬 사자 같은 인상일 때는
조카의 소라를 팔아 주러 나서기 전에
얼른 '다음에 올게요' 했어야 했다.

아줌니는 대뜸 얼마나 살 거냐고 물었다.
1키로라고 하려니 눈치가 보여
우물쭈물 했다.

커다란 수족관 차가 옆을 가로 막자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로
'여기다 세우면 장사는 워치키 혀!'
라며 쫒아 냈다.

바가지에 담긴 소라를 비닐에
쏟아 부으며 '2만원이면 싼규' 하는데
암말 못하고 받아왔다.
자잘한 거 3키로에 2만원이면
비싼 건 아니지 이러면서.

땡볕에 무거운 소라를 들고
걷자니 힘들다.
그렇지, 은행으로 피신하자.

소심함은 넣어두고 잔머리에 스스로 흡족해서
가장 먼저 만난 신협 건물로 들어갔다.
온몸을 감싸는 시원한 기운을 만끽하며
종이컵으로 시원한 냉수를 세 번이나 마셨다.

다음은 새마을 금고.
은행마다 들르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스팔트 지열까지 40도를 육박하는 기온에
이성은 진작에 증발했다.

은행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큰 거리 이쪽 저쪽으로 은행이
포진해 있으니 죽으란 법은 없는 거다.

이제 농협 은행만 지나면 주차장이다.
은행 옆이 하나로 마트이니
음료수 하나 마셔야겠다.

어라? 휴대폰과 지갑이 없다!

그러고 보니 첫번 신협에서
현금을 찾고 폰과 지갑을 정수기 옆에
놓고 왔나 보다.

허겁지겁 힘겹게 올라온 길을 내려간다.
깜빡이는 머리를 저주하며.

다행이 정수기가 지갑과 폰을
머리에 이고 얌전히 있다.
아이인더 스카이(Eye in the Sky) 만세!

주관 내세우지 않고 소심하게 살기가
쉬울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피해 의식도 있다.

상대는 기억도 못하는 의리를 지키느라
3키로의 돌덩이 같은 소라를
사들고 오는 거,

자식들은 더 좋은 거 먹고 다닐 텐데
무슨 자애로운 부모라고 이런 걸 사들고
다니나 싶고,

중요한 결정에 나는 반댈세, 하다가도
쉽게 포기하고 따른 다는 거.

뒷심 약한 건 인정해야겠다.

오늘도 소심과 세심 사이에
그네 타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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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걸어야 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것
소심과 세심이 겠지요 . 사람 살아가는 기본이라 생각 해요

우아…..
베로니카님이 답글을 달아주셨어요!
감사합니다. ㅎㅎ

도잠님~ 글이 재미있어서
마치 단편 소설 읽듯 주욱~ 읽어갔네요! ^^
지갑과 폰을 잘 찾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더운날 소라 정성에 감복한 둘째분이 잘 맡아 놓으셨던 것이 아닌거 싶네요~^^

우앙…..
재밌게 읽으셨다니 소심한 기분이 날아갔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둘 째 온다는 소식에 바빠서 정신이 나갔다 왔군요. ㅋㅋ

이제 더위 한 달 남았습니다.

그러게요.
한달만 잘 견뎌보자구요.

무당도 틀릴때 있어요 흐흐

글츄?
점쟁이가 자기 죽을 날 모른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ㅋ

제 5 회 스팀잇 포스팅 큐레이션 이벤트 참여자 글 - 2025-08-01
https://www.steemit.com/@talkit/-5----------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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